전례 없는 제재에 금융당국 책임론 급부상

최근 시중 은행들이 흡사 ‘초상집’ 분위기다. 지난 4일 금융감독원이 재제심의위원회를 열어 무더기 징계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중징계를 받은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을 비롯해 신한은행, 우리은행, 농협도 금감원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국내서 은행장에 중징계가 내려진 것도 처음이지만 전·현직 은행장에게 무더기 징계를 내려진 것도 전례 없는 일이다. 은행권 내부에서는 징계 이전에 감독기관의 책임도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은행장들이 빙하기를 맞고 있다. 지난 3~4일 재제심의위원회를 연 금융감독원은 전·현직 은행장에 대한 징계를 잇따라 발표했다. 지금까지 금융권에서 손실을 초래한 사례는 수차례 있었지만 이번처럼 무더기 징계가 내려진 것은 처음이다. 특히 수년전 은행장 재직 시절의 투자에 대한 책임까지 물어, 이에 대한 논란은 확산되는 모양새다.


전·현직 은행장 무더기 징계

이중에서도 선봉에 서 시선을 모으고 있는 것은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이다. 황 회장 징계의 단초는 우리은행 행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인 2005∼2007년 부채담보부증권(CDO)과 신용부도스와프(CDS) 등 파생금융상품에 15억8000만 달러를 투자하는 과정에서 비롯됐다. 현재 이로인해 우리은행은 1조6200억원의 손실을 내고 있다. 금감원은 황 회장이 투자 결정과정에서 은행법 등을 위반한 책임을 물어 ‘직무정지’의 중징계를 내렸다. ‘직무정지’를 받게 되면 3년간 금융사 임원으로 선임되지 못한다.

박해춘 이사장(전 우리은행장)과 이종휘 현 우리은행장은 ‘주의적 경고’ 징계를 받았다. 우리은행 투자에 대한 사후관리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금감원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투자의사결정 과정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황 회장이 가장 무거운 징계를 받았지만 박 이사장과 이 행장은 투자자산 사후관리 책임으로 비교적 가벼운 징계를 받았다. 그럼에도 박 이사장은 지난 11일 “재충전 기회를 갖고 싶다”며 사퇴한 상태다.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사장은 신한은행장 시절 발생한 직원 횡령사고에 대한 관리 책임을 물어 ‘주의적 경고’를 받았다. 지난해 신한은행 강원지역 지점에서 225억원 규모의 횡령 사건이 발생했지만 당시 신한은행에서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횡령 당사자인 김모 지점장은 우정사업본부 지부가 은행 지점에 예치한 자금 400억원 중 225억 원을 개인적으로 빼돌렸다가 은행 내부감사가 시작되자 자살했다. 정용근 전 농협중앙회 신용대표는 파생금융상품 투자로 손실을 초래한 책임을 받고 문책 경고를 받았다. 정 전 대표는 농협중앙회 대표 재임 시절이던 2007년 CDO와 CDS에 투자해 2000여억원의 손실을 입은 바 있다. 이에 따라 정 전 대표는 향후 3년간 금융회사 임원이 될 수 없게 됐다. 그밖에 예금보험공사도 이달 중 중징계를 내릴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예보는 황 회장에 대해 손해배상책임 등 민·형사책임까지 추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 현직 은행장급 인사가 문책경고를 받은 사례는 이전에도 수차례 있었다.

지난 2003년 1월 위성복 조흥은행 회장이 670억원 규모의 무역금융 사고로 문책경고를 받았고 2004년 9월 김정태 국민은행장이 회계기준위반, 2005년 11월 최동수 조흥은행장이 250억원대 양도성예금증서 위조발행 사고로 문책경고를 받았다. 이들은 결국 사퇴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현·전직 은행장에게 중징계를 비롯한 문책경고가 무더기로 내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같은 금융당국의 징계에 시중 은행의 분위기는 침통하기만하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이번 징계로 투자은행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면서 “몸보신에 급급해지지 어느 CEO가 공격적 경영을 하겠느냐”고 불만을 토했다.


금감원 책임론도 불거져

한편 금융당국의 책임론도 불거지고 있다. 평소 선제적 감독을 강조해온 금감원인 만큼 은행장 징계에 앞서 금융당국의 책임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황 전 회장의 우리은행 손실에 대한 책임은 지난 2007년 3분기 이후부터 확인된 상황이다. 따라서 최소한 지난해 4월부터에 징계가 이뤄졌어야 하는 셈이다. 실제 지난해 4월 예금보험위원회는 황 회장에게는 ‘성과급 삭감지급’의 경징계를 내렸다. 결국 금융당국이 우리은행의 파생상품 투자에 대한 황 회장의 책임을 알고도 KB금융지주 회장직 취임을 방치하는 등 눈치보기로 일관하다가, 뒤늦게 이중 징계를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은행권 징계 파문에 웃는 하나은행

현재 시중은행의 무더기 징계에 업계 표정관리에 바쁘다. 신뢰성이 생명인 은행권에서 징계가 이뤄지면서 신인도 타격이 불가피한 탓이다. 특히 KB금융지주는 난감한 상황이다.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이 징계를 받은 것은 우리은행 재직시절 투자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현재 KB금융지주의 수장을 맡고 있는데다 직무정지 징계로 업무 공백도 우려되고 있다. 우리은행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황 회장을 비롯해 박해춘 국민연금이사장, 이종휘 우리은행장이 줄줄이 금융당국의 제제를 받았다. 영업정지는 간신히 피했지만 기간경고 등의 조치가 내려진 상황이다. 그밖에 신한은행과 농협의 전?현직 은행장도 고스란히 징계를 받았다. 상황이 이쯤 되니 하나금융지주는 표정관리에 들어간 모양새다. 시중 은행이 줄줄이 징계를 받는 사이 반사이익을 누리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금융지주의 경우 그간 대형 M&A에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밝힌 만큼 우리금융지주를 둘러싼 잡음은 도리어 기회라는 평가도 나돌고 있다. 급변하는 금융권 판도의 귀추가 주목된다.

[강필성 기자] feel@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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