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노태우 대통령 [뉴시스]
노태우 대통령 집무 모습 [뉴시스]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 당시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전두환 정부의 정통성에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박정희 대통령이 핵을 보유하려 한 시도에도 미국이 주목했던 것으로 안다. 일각에서는 전두환 정권이 미국이 원하는 핵 포기와 전두환 대통령이 바라는 정통성 문제를 서로 교환했다고 평가하는데, 대사가 보기에는 어떤가?

▲ 북핵 문제는 내가 정무참사관으로 재직할 때 불거졌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공중감시를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의 영변 핵 활동에 대해서도 상세히 파악을 하고 있었다. 

미국이 1987년 공중감시 정보를 우리 정부에 알리면서 88서울올림픽 전까지 북한이 핵안전조치협정을 체결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도록 대책을 강구할 것을 촉구했다. 우리 정부는 서둘러서 북한에게 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 IAEA의 사찰도 받도록 제반 외교 노력을 기울여 관철시켰다.

북한이 핵안전조치협정에 가입한 후 핵물질 신고 불일치와 일부 핵 관련 의심 시설을 군사시설이라고 주장해 IAEA 사찰 대상에서 제외시킨 핵시설에서 핵 활동을 했음이 밝혀지면서 IAEA에서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그러자 북한이 이를 거부하고 1993년 IAEA를 탈퇴하는 바람에 제1차 핵 위기가 발생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IAEA 활동을 존중하고 비핵화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미국이 정통성 문제에 대해 이해하는 입장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 대사가 주미대사관 정무참사관으로 근무할 때 국내는 대통령 선거 정국이었고,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대선 후보가 됐다. 그때 노태우 후보가 미국을 방문했던 것으로 아는데.

▲ 노태우 후보는 주미공관에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방미를 준비했다. 현홍주 의원을 중심으로 한 별도 팀이 비밀 방미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추진과정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김경원 대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김경원 대사는 노태우 후보의 미국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개스턴 시거 차관보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 당시에 개스턴 시거 차관보가 모스크바에 체류하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은 특정 국가의 대선 후보자를 만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번 방미 요청을 받아주기 시작하면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의 대선 후보들이 몰려오니까 절대로 받아주지 않는데, 김경원 대사가 역량을 발휘해 간단한 스탠딩 대화와 포토 세션만 갖는 조건으로 성사를 시켰다. 

보통 특정 외국의 대선 후보가 백악관에서 대통령과 사진을 찍으면 언론이 전혀 주목을 안 한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은 운이 좋아 언론의 취재 대상이 됐다.

당시 엘리자베스 돌 미국 노동부장관이 사임을 했다. 돌 장관은 미국의 유명한 정치인 밥 돌 상원의원의 부인이었고 미모가 뛰어나 돌 장관의 사임은 언론의 주목 대상이었다. 백악관에 취재진이 잔뜩 모여 있었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마침 도착한 거다. 

돌 장관을 취재하러 몰려 있던 사진기자들이 한국의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이 왔다고 해서 사진을 찍게 된 거다. 대대적인 언론 취재가 정치적으로 상당히 큰 효과를 봤다.

내가 주미대사관 정무참사관으로 재직하던 때는 세력 전이가 진행되는 세계사적 전환기였다. 미·소 군비경쟁의 여파로 소련의 힘이 점점 약화되는 시기에 레이건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 간에 정상회담이 자주 열렸다. 

주미대사관의 우선적 임무 중 하나는 미·소 정상회담의 내용을 파악해 보고하는 것이었다. 백악관과 국무부 업무를 정무참사관인 내가 담당했다. 미국은 미·소 정상회담을 할 때마다 동맹 국가들에게 사전·사후 브리핑을 해준다. 미국의 동맹 국가는 NATO 국가와 한국·일본·호주다. 뉴질랜드는 ANZUS 탈퇴로 빠졌다.

미·소 정상회담 내용을 브리핑해준 사람이 국무부 소련과장 알렉산더 버시바우였고, 그는 나중에 주러대사·주한대사를 역임했다. 

흔히 냉전은 1945년 얄타에서 시작해서 1989년 몰타에서 끝났다고 한다. 미국에 근무하면서 동서냉전이 종식되는 역사적인 전환과정의 전모를 현장에서 목격하는 경험을 얻은 것이 행운이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박사가 그의 저서 ‘역사의 종말’에서 지적한 이념 경쟁의 종지부를 찍는 광경을 목도한 것이다.

- 주미대사관 근무를 마치고는 1990년 4월 대통령 비서실 외교안보비서관으로 발령을 받아 귀국했다. 당시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과 전면적으로 조응하면서 가시적인 결실을 맺어가는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한국이 당면했던 외교적 도전과 과제, 외교적 성과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
 

▲ 나는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다시 미국을 방문할 때까지 미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노태우 정권 탄생의 큰 의미는 정통성 문제가 해소됐다는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채택한 1987년 체제는 노태우 후보가 수용한 6·29선언의 결과물이었다. 노태우 후보는 일여이야(一與二野) 구도에서 자신이 선택한 직선제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럼으로써 정통성이 확보 됐다. 정통성 문제는 더 이상대미 외교 현장에서 거론되지 않았다. 

정권의 정통성 문제가 외교의 주요 사안이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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