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인(왼쪽)과 고은 시인(오른쪽) [뉴시스]
최영미 시인(왼쪽)과 고은 시인(오른쪽) [뉴시스]

 

[일요서울 | 강민정 기자] '성추행 의혹'에 휩싸인 고은(86·본명 고은태) 시인이 자신의 의혹을 폭로한 최영미(58) 시인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지만 법원이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법원은 성추행 주장을 허위사실로 볼 수 없다고 봤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부장판사 이상윤)는 15일 고 씨가 최 씨와 언론사 등을 상대로 낸 10억7000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시인 박진성(41)씨에 대해서만 1000만 원 배상 판결로 인용하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최 씨는 2017년 9월 계간지 '황해문화'에 '괴물'이라는 시를 게재하며 문단 내 성폭력을 고발했다. 시에는 'En선생'의 성추행을 폭로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등 표현이 동원됐고, 'En선생'은 고은 시인으로 풀이됐다.

논란이 확산되자 고 씨는 지난해 3월 영국 가디언을 통해 "최근 의혹에서 내 이름이 거론된 데 대해 유감"이라며 성추행 의혹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파문이 일면서 고 씨는 한국작가회의 상임고문직 등에서 사퇴했고, 지난해 7월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고 씨가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누워서 자위행위를 했다는 내용과 2008년에 20대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내용이 사건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1992~1994년 사건은 한 언론사에 의해 보도됐고, 2008년 사건은 박 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고En 시인의 추행에 대해 증언합니다'라는 글을 게재해 널리 퍼졌다.

재판 과정에서 양측은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고 씨 측은 모두 실제 존재하지 않았던 허위 내용인데 제보가 돼 명예를 훼손했다며 주장했고, 최 씨 등은 고 씨 증언에 신빙성이 없으며 손해배상과 정정보도 책임도 없다고 맞섰다. 최 씨는 변론기일마다 직접 출석하며 고 씨와의 대질 신문을 주장했지만, 고 씨는 건강상 이유로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재판부는 앞선 사건을 두고 "대법 판례에 따르면 특정 기간 어떤 장소에서의 행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하려면 위법이 있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신빙성을 탄핵하는 방법으로 허위 입증을 할 수 있다"며 "최 씨 측은 소명자료로 최 씨의 진술과 직접 목격했다는 진술이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일기 등 몇 가지 정황사실을 근거로 제시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최씨의 진술은 자신의 일기를 근거로 당시 있었던 고 씨의 말 등을 묘사하는데 구체적이며 일관되고, 특별히 허위로 인식할 만한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반면 고 씨의 반대 증거로 제시한 증언이나 주변 사정은 당시 사건이 허위임을 입증하는데 부족하다"고 말했다.

2008년 사건에 대해서는 "박 씨가 제보하고 보도되기도 했던 내용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박 씨의 진술인데 박 씨는 당시 제자라는 여성에 대해 특정하지 못하는 등 제보 내용이 허위내용이라고 인정된다"며 "제보 내용이 진실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되고, 고 씨의 사회평가가 저하되면서 상당히 고통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며 박 씨에 대한 1000만 원의 위자료 청구를 받아들였다.

다만 "고 씨가 문인으로서 문예계에 미치는 영향이나 사안 성격을 보면 공공 이해에 관한 사항이고 공익을 위한 측면이 있다"면서 "언론사 측으로서는 제보 내용에 대해 나름 검토해보고 취재한 것으로 보여 사건 보도가 허위지만 배상책임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언론사에 대한 청구는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이 끝난 뒤 최 씨는 취재진과의 만남에서 결과를 환영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최 씨는 "이 땅에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 재판부에 경의를 표한다. 여러분의 관심과 지지가 없었다면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라며 "저는 진실을 말한 대가로 소송에 휘말렸는데 다시는 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진실을 은폐하는데 앞장 선 사람들은 반성하기 바란다. 성추행 가해자가 피해자를 상대로 뻔뻔스럽게 고소하는 사회 분위기를 용인하면 안 된다"면서 "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문단의 원로들이 도와주지 않아 힘든 싸움이었지만, 용기를 내 제보해주고 증거자료를 모아 전달해준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고 피력했다.

한편 고 씨의 성추행 의혹 사건은 대표적인 '미투(#Me Too·나도 말한다)'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법원에서는 미투의 상대방으로 지목된 이들에 대한 판단이 속속들이 결정되는 상황이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지난 1일 항소심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안태근 전 검사장은 지난달 23일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윤택 전 예술감독도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아 항소심 재판을 진행하고 있는 도중 추가 폭로자들이 나오면서 별건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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