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든다. 국회의원들에게 법안이나 현안을 설명하기 위해 정부부처 공무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온다. 크고 작은 기업에서도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대관 담당자를 앞세워 국회 정문을 넘는다. 민원을 들고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해당 상임위 국회의원에게 힘써줄 것을 부탁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런저런 피해를 본 사람들도 국회를 찾아온다.

때론 귀찮고, 때론 무시할 수 없는 여러 방문객들 속에서 특히 외면하기 힘든 사람들이 꼭 있다. 최근에는 5.18 민주화운동 왜곡, 비하 문제로 멀리 광주에서 5월 단체 사람들이 국회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고 의원실 문을 두드렸다.

이런 사람들의 방문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성심껏 들어주고 공감하고 노력하다 보면, 사실 국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다. 그들의 억울함에 동참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억울하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정치사회적으로 억울한 사람의 많고 적음과 그 억울함을 어떻게 풀어 주는가에서 드러난다.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은 아직 성숙한 사회라기엔 부족하다. 대한민국에서는 억울한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국회에는 이런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의원실 문을 두드린다. 이런 사람들의 억울함은 대개 사회적 모순에서 발생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경우도 없지는 않다.

별 인연도 없는 국회의원실 문을 두드리는 억울함 중에 세월호 유족들, 천안함 유족들, 독립유공자나 보훈대상자, 군 의문사나 부상자 가족과 같이 우리 사회가 같이 고민해야 할 사안은 만날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대출사기를 당했거나, 보험상품에 들었는데 보험사가 보험료를 지급하지 않거나, 정치적 모함을 호소하거나, 이웃 간의 분쟁을 들고 오는 분들은 마땅히 도와 줄 방법을 찾기 어려워 안타까울 때가 많다.

억울함에 사회적 문제에서 비롯된 분들이나 사적인 것에서 비롯된 분들이나 한결같이 국가가 나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국가는 이들의 바람과 달리 모든 억울함에 귀 기울이지는 않는다. 세월호의 경우처럼 국가 차원에서 관련 법을 제정하고, 진상 규명에 나서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보상금을 지급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심지어 이렇게 국가 차원에서 나서도 억울함이 다 풀리지는 않는다.

미셸 오바마의 자서전 ‘비커밍’을 보면 미국 사회가 사회적 억울함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우리와 많이 다르다. 미셸 오바마는 불우한 환경의 젊은이들을 위한 취업 훈련프로그램인 ‘퍼블릭 앨라이스’시카고 지부를 만드는 것에서 사회활동을 시작했는데, 기부금을 모으고, 활동가를 조직하고,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훈련 프로그램을 구성, 인재를 교육해서 협약체결 기관에 인턴십으로 보내는 방식으로 활동한다. 국가의 몫, 시민사회의 몫이 따로 있다.

우리는 억울함을 풀어줄 책임이 온전히 국가에 있다고 여긴다. 군의문사 가족들도,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거제도를 바꾸려는 시민단체들도 대통령에게만 호소하고, 국회만 상대한다. 특별히 사람을 조직하려 들지도 않고, 기부금을 끌어모을 생각도 없어 보인다.

널리 알려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홍보감각을 발휘하는 것도 보기 어렵다. 이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때가 된 것 같다. 활동가를 조직하고, 자금을 모으고, 적극적 홍보로 시민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프로페셔널한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 국가에 호소하기보다는 국가가 나설 수밖에 없는 정치, 사회적 환경을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무진 국회 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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