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광공사 2018년 3월 추천 가볼 만한 곳 ⑦

조선의용대 시잘 김원봉의 연설 장면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조선의용대 시잘 김원봉의 연설 장면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약산 김원봉이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를 찾으며 한 말이다. 이 영화에 1200만이 넘는 관객이 들면서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밀양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해 약산이 태어난 집터에 의열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단정하고 아담한 건물로 들어가면 김원봉을 소개하는 글과 함께 의열 투쟁의 주요 연표가 보인다. 이어지는 대형 스크린에는 약산과 의열단의 항일 독립 투쟁 관련 영상이 펼쳐진다. 조선의용대 시절 약산이 연설하는 영상도 있다. 학생 때부터 웅변으로 대중을 휘어잡았다는 약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형형한 눈빛은 지금도 듣는 이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1898년 경남 밀양군 부북면 감천리 57번지(현재 밀양시 노상하125-12)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어린 시절부터 항일 독립 의식이 투철했다고 한다. 보통학교(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본 왕의 생일 축하 행사를 위해 나눠준 일장기를 화장실에 처박았을 정도. 학교가 발칵 뒤집혔고, 김원봉은 자퇴했다. 이 일을 함께한 인물이 이웃에 사는 동생 윤세주다. 두 사람은 뒷날 함께 의열단을 만들면서 항일 독립운동의 동지가 된다. 의열기념관 바로 옆 공터가 윤세주의 생가 터다. 지금 이곳에는 미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일제와 전투 중에 눈감은 윤세주 열사를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보통학교를 자퇴한 약산과 윤세주는 몇 년 뒤 밀양의 동화학교에 입학했다. 충의를 목숨처럼 여기는 선비의 고장 밀양에서는 일찍이 민족 교육에 힘썼고, 그 중심에 동화학교가 있었다. 밀양이 독립운동의 요람이 된 것도 이런 교육의 영향이 컸다. 마침내 독립운동에 투신할 뜻을 세운 약산은 중국으로 떠나, 당시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밀양에 남아 만세 운동을 주도한 윤세주는 일제의 검거를 피해 약산을 찾아갔다. 그해 11월 만주 지린(吉林)에서 조선 청년 10여 명은 천하의 의로운 일을 열렬히 실행하기로 맹세했다. 이름만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의열단이 탄생한 것이다. 의열기념관 2층에는 이들이 모여 의열단을 결성한 반씨 주택을 재현한 공간이 있다.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 사진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 사진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의열단은 식민 지배자와 민족 반역자 처단,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 지배 기관 파괴에 집중했다. 정규 병력으로 맞설 수 없는 일제에 대항해 무력 투쟁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고, 김익상과 이종암 등이 상하이(上海)에서 일본 육군대장을 저격하고,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이 모든 투쟁의 배후에 의열단장 김원봉이 있었다. 약산의 아내 박차정도 항일 투쟁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르고 의열단원인 오빠의 도움으로 망명, 의열단에 가입하고 김원봉과 결혼했다. 박차정은 항일운동을 계속했으나, 안타깝게도 해방 1년을 남기고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의열기념관 2층에서 박차정의 독립운동 활동을 자세히 소개한다.

의열기념관 일대는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로 꾸며졌다. 해천은 의열기념관 앞을 흐르는 시내로, 조선 시대 밀양읍성을 따라 조성한 방어용 해자다. 근대 이후 읍성과 함께 사라진 해천은 몇 년 전 복원돼 시민의 산책로 겸 휴식 공간으로 돌아왔는데, 여기에 항일운동 벽화를 더한 것이다.

밀양의 만세 운동 벽화로 시작하는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는 태극기의 종류와 변천사를 거쳐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사진으로 이어진다. 조선의용대는 김원봉과 윤세주가 주축이 되어 만든 독립운동 단체다.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 중심이던 의열단 투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 맞설 무장 부대를 조직한 것이다. 이후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합류했고,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은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이 됐다.

일제강점기 내내 해외에서 항일 독립 투쟁에 앞장선 약산은 해방 뒤 고국으로 돌아와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 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미군정이 다시 고용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온갖 수모를 겪고, 뜻을 함께한 여운형마저 암살당하는 등 남한에서 활동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마지막으로 분단을 막기 위해 김구와 같이 삼팔선을 넘어가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김원봉은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북한 정권에 참여했으나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다.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에 빼곡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명단에서 훈장이나 표창이 없는 이는 약산 김원봉이 유일하다. 월북했다는 이유로 독립 유공자 서훈조차 하지 않은 탓이다. 약산은 남과 북에서 모두 잊힌 독립운동가다.

김원봉 생가터에 문을 연 밀양 의열기념관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김원봉 생가터에 문을 연 밀양 의열기념관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의열기념관에서 500m쯤 떨어진 밀양 관아지는 1919313, 밀양 최초로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고종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경성(서울)으로 간 윤세주는 탑골공원에서 벌어진 3·1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와, 19세에 밀양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여기에는 김원봉과 윤세주의 스승이자 동화학교 교장을 지낸 전홍표의 도움이 컸다. 함께 경성에 간 윤치형 등과 거사를 준비한 윤세주는 밀양 장날인 313일에 태극기 수백 장을 나눠주며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이곳에는 밀양군청 건물이 있었고, 바로 앞이 밀양시장이라 많은 사람이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현재의 관아 건물은 모두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윤세주와 윤치형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만주로 망명, 의열단원이 되어 평생 항일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밀양 영남루(보물 147)도 항일 독립운동과 연결된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영남루에는 현판과 시문이 많은데, 이중에 김원봉이 입학한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의 집안 아저씨인 귤산 이유원의 글씨가 있다. 영남루 맞은편에는 단군을 모신 천진궁이 있는데, 이회영의 동생이자 독립운동가 이시영은 해방 후 이곳에 와서 단군 봉안회를 치렀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명루로 꼽히는 영남루에 오르면 굽이쳐 흐르는 밀양강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밀양의 독립운동 역사를 자세히 보고 싶다면 밀양독립운동기념관으로 가자. 건물 마당에는 김원봉과 윤세주를 포함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36명의 흉상이 관람객을 맞는다. 안으로 들어가면 밀양 만세 운동의 풍경이 생생한 디오라마로 펼쳐진다. 밀양에서는 3·13 만세 운동을 필두로 8차례 만세 시위가 있었다. 여기에는 계급과 이념, 종교를 초월해 수많은 사람이 참여했다. 이어지는 전시실에는 의열단에서 시작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의 활동이 자세히 소개된다. 김원봉이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생 중에는 시인 이육사의 이름도 보인다.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지는 김원봉의 활동, 동맹휴업과 노동쟁의, 사회운동으로 일제에 저항한 밀양 사람들의 투쟁도 살펴볼 수 있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과 나란히 자리한 밀양시립박물관은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기 전, 선비의 고장 밀양의 역사를 보여준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공룡과 익룡 등 다양한 고생물 화석이 있는 화석전시실도 빼놓을 수 없다. 밀양시립박물관 바로 옆은 산책로와 놀이 시설을 갖춘 밀양아리랑대공원이다. 공원 안쪽에 한국전쟁 전사자를 기리는 충혼탑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의열단에서 한국전쟁 전사자까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우리 역사에 면면히 흐른다.

[글=한국관광공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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