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지정학적 상황 복잡한 지역에서는 외교전략 잘 짜야”

정태익 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 [뉴시스]
정태익 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 [뉴시스]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위원장을 1년 정도 맡은 후,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발령이 났다. 지금의 국립외교원이다. 외교안보연구원은 주로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하나? 덧붙여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취임하고 나서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자 했던 일?

▲ 외교안보연구원 원장직은 차관급 정무직이다. 정무직은 외교부에 세 자리가 있다. 장·차관직과 외교안보연구원 원장직이다. 정무직에 오르게 돼 솔직히 기뻤다. 원장에게는 외교관의 자질을 향상하는 교육을 담당하고 동시에 외교정책을 연구·개발하는 임무가 부여돼 있다. 내 전임자는 이승곤 원장이었다. 내가 임명된 것은 세대교체의 의미가 있었다.

내가 기획관리실장 때 생각했다가 이루지 못한 것이 외교 사료관 건립 문제다. 외교안보연구원 부지에 사료관을 지어 외교 사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활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교 사료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해 국제 문제에 대한 국민의 의식수준을 제고하고, 학자·언론인·공직자 등 외교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역사교육에도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같이 지정학적 상황이 복잡한 지역에서는 외교전략을 잘 짜는 것이 생존과 번영에 필수 요소이기 때문에 사료관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공약을 했다.

일본은 우리보다 한 30년 앞서 외교 사료관을 도쿄 한복판에 세웠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한국 외교에 관한 사료가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고, 일본이 우리를 대신해서 외교를 했기 때문에 사료가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그 사료들을 되찾아야 한다. 그런 외교사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이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사료관 건립 계획을 공표했다. 그러나 원장으로 재직한 기간이 짧아 포부를 실현하지 못하고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 대사는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부임한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2001년 10월 대통령 비서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됐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 발탁 배경은?

▲ 2001년 7월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서 포부를 밝히고 연구원을 발전시킬 각오로 다지고 취임했는데, 홍순영 주중대사가 갑자기 통일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후임으로 김하중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 주중대사로, 후임 외교 안보수석비서관에 내가 임명 됐다. 

갑자기 개각을 하면서 연쇄 인사조치가 취해진 거다. 통보받는 시점도 극적이었다. 세계 외교안보연구원장 회의가 각국을 돌아가면서 매년 열리는데, 2001년 9월에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회의가 개최됐다. 거기에 내가 참석하고 돌아오는데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임명 통보를 받았다.

세계외교안보연구원장 회의에서 오스트리아 대표가 홍보 외교 성공사례를 발표하는데, 외교관을 홍보관으로 훈련시켜 파견했더니 외교 효과가 기대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과거에 해외 공보관(지금의 문화원)을 설치해 국가 홍보 기능을 맡겼는데, 미국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미국 공보원(USIS: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은 인원과 예산 면에서 규모가 세계 1위다. 오스트리아는 중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외교관을 홍보관으로 훈련시켜 보냈더니 공공외교 효과가 대단했다는 것이다. 

나는 외교안보연구원에서 모든 외교관을 공보관으로 양성하는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귀국 도중 갑자기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대통령 가까이에서 순발력 있게 외교 안보 현안을 보고하고 대안을 적절하게 제시하는 막중한 자리다. 부임하고 가장 처음에 마주한 현안은 어떤 것들이었나?

▲ 내가 어떻게 중책을 맡게 됐는지를 알기 위해 내 행적을 돌이켜 보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이탈리아 방문이 역사적 사건이었다. 북한과 이탈리아의 수교가 성사되면서 외교적으로도 북한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내 주도로 동서 화합의 상징인 대구 밀라노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대구와 밀라노 간의 자매결연협정이 체결됐다. 내 외교 실적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또 이탈리아 방문을 계기로 나를 알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 방문이 김대중 대통령의 기억 속에 특별히 남아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한 직후에 발령을 받았다. 워낙 긴박한 사건이었으므로 김하중 수석이 주중대사로 발령이 났지만 업무를 당분간은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취임이 한 달가량 지연됐다. 

그 사이에 9·11테러의 배후가 탈레반임이 밝혀졌다. 탈레반의 소재가 아프가니스탄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본거지를 응징하기 위해 공격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공교롭게 내가 취임하는 날 전쟁 일자를 결정하고 동맹국인 한국에 사전 통보를 하게 됐다. 미국은 동맹국가에게는 중요 조치 사안에 대해서 사전 통보를 한다. 동맹국가를 구분하는 기준은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전 통보를 하느냐 안 하느냐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 결정을 사전 통보했다.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기 몇 시간 전에 미국대사가 내게 전화를 해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개시한다고 알리고 대통령께 보고해 달라고 했다.

부임 첫날 밤 12시가 지나 새벽 1시쯤 통보하면서 2시간 후, 우리 시간으로 새벽 3시에 공격을 개시할 예정이니 대통령에게 보고해 달라는 것이다. 상당히 고심을 한 후 대통령을 밤중에 깨워 보고했더니 비서실장과 관계 수석들과 상의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새벽에 비상수석회의가 소집되었고, 미국의 공격 개시와 관련해 미국 조치를 지지하는 성명을 아침에 대통령 명의로 발표할 수 있었다. 테러 행위를 규탄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반테러 조치를 지지하고 지원한다는 것이 성명서의 핵심 내용이다. 신속하게 조율된 정부 성명서가 적기에 발표되는 것이 중요하며 실기를 하는 것은 효과를 반감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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