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정계복귀, 개혁의 선두에 서다

충혜왕의 큰 아들인 8세의 어린 세자 왕흔(王昕)은 부왕이 폐위되었을 때 볼모로 원나라에 머물고 있었다. 왕흔의 몽골 이름은 팔사마타아지(八思麻朶兒只)로 총명하고 사리에 밝았다. 아버지가 폐정을 저지르고 귀양 도중 독살된 것을 나중에 알게 된 왕흔은 부왕의 갑작스런 죽음을 천명으로 받아들이고 하늘이 무너지는 천붕(天崩)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다.

원나라 조정은 충혜왕을 독살하면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것일까. 충혜왕에게 마지막까지 충성한 이조년(李兆年)과 한종유(韓宗愈) 중 이조년이 별세하자 원자(元子, 뒤의 충목왕)를 부탁하고자 고려에서 찬성사 한종유를 연경으로 불렀다. 한종유는 충숙왕이 차츰 정치에 싫증을 느껴 한때 왕위를 심양왕 왕고에게 넘겨주려 했으나 이를 반대하여 왕위를 양위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한 사람이다.

갑신년(1344, 충혜왕 복위5) 2월 초.

환관 고용보(高龍普)는 내시 박불화(朴不花) 등과 협의하여 기자오의 딸을 원나라 순제(順帝)의 제2황후(기황후)로 승격시키고 측근으로 권세를 잡은 사람이다.

고용보가 어린 왕흔을 옹위(擁衛)하여 원의 순제를 알현하였을 때, 순제는 왕흔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네 아버지를 본받으려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네 어머니를 본받으려 하느냐?”

이에 어린 왕흔은 주저 없이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니를 본받으려 하옵니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부왕은 백성들을 사랑함에 모자람이 있었사옵니다.”

“옳다. 너의 생각이 참으로 바른 것을 보니 영특하기 그지없구나.”

원나라 순제는 왕흔이 선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성격을 좋아하여 왕흔을 고려왕으로 책봉했다. 그가 제 29대 충목왕(忠穆王)이다. 순제는 조칙(詔勅)으로 충혜왕에게 충절을 바친 한종유에게 좌정승을 제수하고 충목왕을 호종해 귀국하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충목왕에게 ‘충혜왕의 폭정(暴政)을 개혁하라’는 교지를 내려 강력한 고려의 개혁을 요구했다.

근래 충혜왕은 방자하게 무도한 짓을 자행하여 나라 안에 해독을 끼치게 되었다. 이에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여 경사(京師, 원나라 수도)에 와서 호소하므로 그 죄를 물어 귀양을 보냈다. 이에 그의 아들 왕흔에게 ‘정동행성좌승상 고려국왕’의 직을 상속시키니 짐의 덕을 선포하여 신료들을 경계하여 충혜왕의 폐정을 모두 바로잡고 백성을 위휼케 하라.

충목왕 즉위년(1344년)은 그야말로 개혁의 한 해였다. 충목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모후인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攝政)을 시작했다.

2월 병인일. 덕녕공주는 정천기(鄭天起), 한범(韓范), 장송(張松) 등 선왕에게 아첨하던 폐신(嬖臣)들을 대부분 귀양 보내거나 낙향토록 하였으며, 선왕 때 불량배들에게 준 직첩(職牒, 임명사령서)을 모두 회수하고 기강을 바로잡았다.

종1품 판삼사사로 정계에 복귀

충목왕이 즉위한 후 두 달이 지났다. 예성강 제방에는 꾀꼬리 우짖고, 제비들은 새 집을 짓기 위해 진흙 밭을 뒤척이며, 꽃과 나비가 물결치는 계절이 돌아왔다. 시절이 돌고 돌듯이 자연의 섭리를 따라 살아온 초로의 이제현에게도 다시 정치의 봄이 돌아왔다.

4월 계유일.

58세의 이제현은 다시 시대의 소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피봉되어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정계에 복귀했다. 판삼사사는 전곡의 출납과 회계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삼사(三司)의 으뜸 벼슬인 종1품이다. 충선왕의 그늘을 벗어난 뒤 처음 맞는 기회였고, 그의 인생에서 제2의 전성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날 충목왕은 채하중(蔡河中)을 우정승으로, 한종유를 좌정승으로, 김륜·박충좌·안축 등을 정2품 찬성사로 함께 임명하였다.

이제현은 그동안 조정에서 여러 차례 출사(出仕)해 줄 것을 종용해 왔으나 그때마다 정중하게 사양하며 초야에 묻혀 은둔했었다. 그런 이제현이 정계복귀를 결심한 배경은 이러했다.

충혜왕의 폭정과 만행으로 인한 정치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충목왕이 즉위하자 고려가 처한 혼란을 극복하여 나라를 바르게 세우자는 ‘부정삼한(復正三韓)’의 주장을 외면할 수 없었다. 또한 부마국 고려의 안정이 자국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고려의 폐정개혁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한 원나라의 입장도 이제현의 정계복귀를 유인했다.

이제현은 덕녕공주의 섭정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을 자신의 정계복귀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만약 충혜왕의 폐정이 계속되었더라면 이제현이 정계에 복귀하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정계복귀 사령장을 받던 날 밤, 이제현은 잠자리에 누워서도 앙앙불면(怏怏不眠)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잠이 들었는데, 잠은 이내 꿈으로 변했다. 4년 전 작고한 최해가 꿈에 나타나 이제현을 보고 말없이 웃고 있었다. 이제현은 꿈속에서나마 옛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이 하도 반가워서 최해의 손을 왈칵 움켜잡으며 말했다.

“졸옹, 자네는 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웃고만 있는가?”

“내 방의 불을 꺼야 세상의 어둠을 볼 수 있는 법이네.”

“그게 무슨 뜻인가?”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 걸세.”

“졸옹, 졸옹…….”

몇 마디 아리송한 말만 남기고 홀연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최해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워 옛 친구를 소리쳐 부르다가, 자기 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다.

이제현은 야릇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 참, 이상스럽기도 하지. 죽은 뒤 한 번도 꿈에 나타난 일이 없는 친구가 오늘 따라 꿈에 나타난 일은 웬일이며, 내방의 불을 꺼야 세상의 어둠을 볼 수 있는 법이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이제현은 최해가 꿈속에서 던진 화두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작은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정치를 떠날 때 ‘저술 활동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명분이 있었듯이, 정치에 복귀할 때도 거기에 맞는 명분이 필요하다. 그것은 조정이 새롭게 지향해야 할 개혁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무지렁이 백성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눈이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치개혁 설계에 몰입하다

정치개혁 설계는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다.

피폐해진 국운을 되살리고 헐벗은 민초들의 삶을 다시 굳건히 세우는 일이 하루 이틀 만에 정리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현은 몇날며칠 밤을 지새우며 정치개혁의 기본설계와 방향을 잡아가고 있었다. 힘든 작업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널부러져 있는 4월 말 어느 날 해질 무렵, 찬성사를 제수받은 결발동문 박충좌와 안축이 축하 인사차 찾아왔다.

“익재, 조정 출사(出仕)를 진심으로 경하하네.”

“치암(恥菴, 박충좌의 호), 근재(謹齋, 안축의 호), 어서 오시게. 다시 고생길로 들어섬일세.”

이제현의 사랑방 너머 정원 마당은 타는 듯한 붉은 노을이 어둠에 밀려가고 있었다. 바람은 시원했다. 둘째 부인 박씨가 주안상(酒案床)을 내왔다. 봄철에 좋은 두견화주에 육포, 호두, 채소전이 소담스럽고 맛깔스러웠다.

세 사람은 교자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조정의 세 거두는 이심전심이랄까 말없이 그저 술만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벌써 한 주전자의 술이 바닥났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던 박씨 부인이 한동안의 정적(靜寂)을 깼다.

“이렇게 외롭게 지내는 몸으로 귀한 옛친구 분들을 맞고 보니, 참으로 기다리며 살아온 보람이 있다 여겨집니다. 제가 한 잔씩 권해도 흉보지 마세요.”

“아이고, 제수씨 고맙습니다.”

박충좌와 안축이 술잔을 받고 난 후 다시 박씨 부인에게 잔을 되돌렸다.

“우리 술도 한잔 받으셔야지요.”

“예.”

술잔을 받고 난 박씨 부인은 수줍은 미소를 띠며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대감들께서는 그 옛날의 정리(情理, 인정과 도리)를 잊지 마시고 힘을 합쳐 어린 주상 전하를 잘 보필하여 조정을 바로잡아 주세요.”

“이를 말씀입니까, 제수씨.”

술이 거나해진 박충좌가 너스레를 떨며 장단을 맞췄다. 오랜 세월 야인으로 있었던 선비의 아내로 한을 씹고 있던 박씨 부인은 어린 주상의 보필과 조정의 개혁을 당부할 만큼 현숙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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