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지루한 장맛비도 안축의 장례식에 때맞추어 그쳤다. 장례식이 끝나자 이제현은 수철동 서재에서 안축이 제 고향인 풍기 땅의 죽계(竹溪)와 순흥(順興)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읊조리며 고인을 추모했다.
초산효와 소운영이라는 기녀들과 동산 후원에서 노닐던 좋은 시절에, 꽃은 난만하게 그대 위해 피어 버드나무 그늘진 골짜기에 우거졌는데, 홀로 난간에 기대어 다시 오실 님 기다리느라 급해진 마음은 새로 나온 꾀꼬리 울음소리에 깃들여 있네. 
아! 한 떨기 꽃처럼 구름 같은 검은 머릿결 흘러내리고 또 흘러내리는데, 아름다운 꽃들 조금씩 붉어질 때면, 아! 천리 밖 먼 곳의 님 그리운 상사병을, 또 어찌하면 좋으리오? 
이제현은 불현듯 8년 전에 작고한 최해가 그리워졌다. 그는 만년에 평생지기 두 사람이 먼저 죽고 자신과 박충좌만이 외롭게 남자, 석양이 지는 황혼녘에 쓸쓸한 심정과 속절없는 눈물을 담아 안축과 최해를 그리워하는 시를 읊었다.

익재가 젊었을 때 서로 따르는 이는       
다만 당지(當之, 안축의 자)와 졸옹(拙翁, 최해의 호)이었다네.            
사십 년 지나는 동안 모두가 죽어가고  
나만이 눈물 흘려 서풍에 뿌리노라.  
 

안축은 충혜왕 때 왕명으로 강원도존무사로 파견되었다. 이 때 ≪관동와주≫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거기에는 충군애민(忠君愛民)의 뜻이 담겨 있다. 또한 경기체가인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을 지어 문명이 높았다. 순흥의 소수서원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근재집≫이 있다.

1348년(충목왕4) 12월 말. 
대륙에서 불어오는 북풍은 매서웠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인간의 지각을 모두 앗아가는 듯하였다. 개경의 노인들은 수철동 이제현의 정원에 있는 느티나무를 ‘자명목(自鳴木)’이라 불렀다. 수 백년 동안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이 나무는 울었다 한다.
그해 섣달 그믐날 밤에도 이 나무는 밤새워 울었다. 이제현은 이 느티나무의 울음소리를 듣고 사랑방에서 정원으로 걸어나가 나무 밑동을 위아래로 쓰다듬으며 충목왕이 붕어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병약했던 어린 왕은 그즈음 병이 더더욱 악화되었다. 천문을 담당하는 서운관(書雲觀)이 ‘별들이 일렬로 늘어서고 북서쪽 하늘에 혜성이 지나갔다’는 길조를 발표했음에도, 어린 왕은 차도가 없었다. 
그날 밤. 마침내 충목왕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병사했다. 그해 8월 말부터 충목왕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자 모후 덕녕공주는 전국의 명산대찰(名山大刹)과 사당에 재를 설치하고 왕의 쾌유를 빌었다. 이후 왕의 거처를 건성사로 옮겨 요양토록하고, 그래도 차도가 없자 거처를 김영돈의 집으로 옮겨 지극히 간호했건만 하늘은 어린 영혼을 외면한 것이다. 
다시 관직에 복귀해 개혁의 불씨를 되살리고자 노력하고 있던 이제현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이제현은 충목왕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린 영혼을 파먹은 악마를 저주했다. 이제현은 충목왕의 죽음에 통곡으로 오열하며 어린 나이에 부왕을 잃고 왕위에 오른 충목왕의 영혼을 위로하는 마음을 담아 시를 읊었다.

철없이 뛰어놀아야 할 어린 영혼 
한줌 흙이 되어 흔적 없이 사라지니 
애달프다 왕의 인생 열두 해가 부질없네.
왕의 육신 갈 곳 없어 서천(西天)에 떠다니면 
내 한 몸 한 조각의 구름배 되어 
두리둥실 잠든 영혼 위로 여행 떠나리. 

새 왕을 정해줄 것을 표문으로 올리다

덕녕공주는 호군 신원보를 원나라에 보내 충목왕의 죽음을 알렸다. 
그녀는 덕성부원군 기철과 정승 왕후에게 국사를 섭행(攝行, 통치권을 대행함)시켰다. 
고려 왕실과 대신들은 충목왕이 죽자 누구를 왕으로 추대하느냐의 문제로 논의가 분분했다. 조정에서는 원나라에 표문을 올려 새 왕을 정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마침내 원로 이제현이 표문작업을 위한 조정의 대표로 선발되었다. 그는 표문을 작성하면서 고민했다. 민심을 따를 것이냐, 섭정을 생각하고 있는 덕녕공주의 뜻을 따를 것이냐, 이것이 문제였다. 
이제현은 두 가지 방안을 놓고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끝에 민심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하여 두 가지 큰 원칙을 세웠다. 하나는 신왕의 나이요, 다른 하나는 고려백성들의 바람이었다.
이제현은 이 두 가지의 원칙을 가지고 왕후, 이곡, 이승로, 윤택 등과 의견 조율을 끝내고 표문작업에 들어갔다. 며칠을 고민하면서 붓을 잡지 못하고 있던 이제현은 갑자기 영감이 떠오르고 감정이 복받쳐 단숨에 표문을 써내려갔다. 그는 뜬눈으로 밤을 새다시피 했다. 여명이 문 앞으로 다가와 주춤거릴 때 이제현은 설핏 들었던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곁에는 지난밤에 써놓은 표문이 고즈넉하게 놓여 있었다. 

1349년(충정왕1) 2월 중순. 

이제현은 다시 조정의 대표로 원나라 연경에 도착했다. 그는 충목왕이 죽은 이후 신왕 책봉을 제기하는 표문을 원나라 황제에게 전달하였다.
“사왕(嗣王)이 병으로 인하여 불행히 세상을 떠났사옵니다. 온 나라가 황황하여 인심이 의지할 곳 없고 신료들은 주야로 왕의 책봉이 있기만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온 나라가 애통할 뿐 아니라 왕이 나이가 어려 후손이 없사옵니다. 왕기(王祺, 뒤의 공민왕)는 충혜왕의 동복(同腹) 아우로서 이전부터 상국에 가서 입시(入侍)하고 있으며 나이는 20세이며, 왕저(뒤의 충정왕)는 충혜왕의 서자로서 현재 본국에 있으며 나이는 12세이옵니다. 
바라옵건대 황제께서는 고려 인민들의 소원을 참작하여 특별한 명을 내려 끊어진 왕대를 계승하게 해주시면 더욱 근왕(勤王, 임금을 위하여 나라 일에 힘씀) 하는 충정을 지키지 않겠사옵니까?” 
왕기는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충혜왕의 동생이었다. 그는 1330년 5월에 태어나 강릉대군에 봉해졌으며, 충혜왕 복위 2년(1341)에 원나라 순제의 입조 요구에 따라 12세 때부터 줄곧 8년 동안 연경에서 볼모로 생활하고 있었다. 왕저는 충목왕보다 한 살 아래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이제현은 우선 왕기를 앞세워 거론했다. 왕기는 20세, 왕저는 12세임을 밝혀 왕저가 나이가 어리다는 점을 은근히 부각시켰다. 또한 백성들의 바람에 따라 왕을 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고려에서 왕기가 보다 적합한 왕위 계승자라는 여론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반영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왕기는 이제현, 왕후, 이곡, 이승로, 윤택 등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반면 왕저는 노책, 최유 등의 부원배들과 손수경, 이군해 등 덕녕공주의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들, 그리고 윤시우 등 희비 윤씨 배후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각기 자신들이 지지하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원나라 조정에 활발하게 로비를 전개하였다. 정치적 식견이나 고려 내에서의 신망에 있어서 왕기 지지세력이 왕저 지지세력보다 훨씬 우월했다. 
원나라 순제는 이제현으로부터 표문을 받은 후 왕저를 입조(入朝)하라고 명했다. 최유, 손수경, 윤시우 등이 왕저를 데리고 연경으로 떠나려 하자 고려의 전법관들이 회의를 소집하여 그들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원나라 사신의 힘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5월 그믐날. 원나라 순제는 왕저를 고려 제30대 왕에 책봉하였다. 이로 인해 왕기는 왕위계승 경쟁에서 조카들에게 두 번이나 연속으로 밀려나는 불운을 당했다.
한편, 이무렵 연경의 해월이는 여러 번 승차하여 만권당의 관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왕저가 고려왕의 책봉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오히려 이제현을 위로했다.
“왕기 대군께서 또다시 왕위경쟁에서 탈락하여 실망이 이만저만 아닐 것 같아요. 대감께서 대군을 한 번 만나보시지요.”
“그렇게 해야겠지. 그러나 별 뾰족한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는구먼.”
“이번의 책봉 문제는 처음부터 왕기 대군이 불리한 상황이 아니었나요?”
“사실은 그렇다고 봐야지. 5년 전에 원나라 조정과 기황후가 이미 장성해서 다루기 힘든 왕기보다는 8살이었던 왕흔(王昕, 충목왕)을 왕으로 삼았던 것과 같이, 이번에도 기황후의 지지를 받고 있는 왕저가 왕의 책봉을 받을 거라는 예상을 못했던 것은 아닐세.”
“그렇지요. 대감께서는 왕기 대군이 왕이 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하여 왕기 대군을 민 것 아녜요.”
“그러나 저러나 고려의 앞날이 걱정이야……. 기황후도 고려의 백년대계를 생각하여 후계구도를 결정했어야 했는데…….”
“왕저가 보위에 오르면 대감의 신상에도 무슨 변화가 있지 않을까요?”
“새 술은 새 부대란 말도 있지 않는가. 조용히 물러나 학문에만 몰두할 생각일세.”
“대감께서 환로(宦路)에서 물러나면 어렵게 진작되었던 충목왕대의 개혁정치가 퇴조하지 않을까요?” 
“매사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금물일세그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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