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인조는 신흥세력으로 떠오른 청나라를 오랑캐로 몰아 기울어가는 명나라를 사대하다 청나라의 침략에 항복하고 삼전도로 나아가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는 굴욕을 당했다. 현실을 무시한 사대주의 외교의 참담한 결과였다. 
세계 패권국의 일원으로 당당히 이름을 떨쳤던 일본도 정세를 잘못 판단하는 바람에 치욕적으로 패망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1929년에 터진 미국발 대공황의 영향으로 식민지화에 더욱 열을 올리며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중국을 지원하는 미국과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유렵 국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독일에 줄을 서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 독일에 대한 과대평가와 미국이 결코 전면전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오판했던 것이다. 
조선(대한제국)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청나라와 러시아에 의존하는 갈팡질팡 외교를 펼치다 36년간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국치를 마련했다. 

잘못된 국제정세 판단에 따른 외교는 이처럼 한 나라를 망하게 만든다. 

역사는 반복한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지금 우리나라는 인조시대와 구한말과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 때는 강대국들이 조선을 속국으로 삼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지만, 지금은 우리를 서로 자기 편이 되라는 유무형의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들은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합종연횡을 하고 있다. 특히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외교전이 활발하다. 북한까지 비정상 체재를 국제사회로부터 보장받기 위해 이리저리 뛰고 있는 형편이다.

세계 최강인 미국은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고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물밑교섭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아베 총리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수시로 만나 양국 관계 강화를 꾀하는 한편 영국과도 군사 동맹을 구축하기 위해 합동훈련을 하는 등 생존을 위한 노력을 다 하고 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 정작 외교 각축전의 중심에 서 있는 대한민국은 이 같은 국제외교전을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어 국민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우리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줄 수 있는 미국·일본과는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고, 경제적 보복을 일삼으며 우리나라를 자신의 속국인 양 무시하는 중국에게는 제대로 따지지도 못한다. 러시아는 한국외교에 아예 없을 정도다. 

이 정부가 전력투구하는 남북관계는 유리하면 대화하고, 불리하면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며 외세와 단절하라고 겁박하는 북한에 속수무책이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있는 ‘갈라파고스 외교’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해양세력이 대륙세력에 승리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무조건 해양세력에 줄 서라는 얘기가 아니다. 상황에 맞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말이다.

조선시대 광해군은 실리를 추구한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임진왜란 후유증으로 명나라가 급속히 쇠퇴하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의 세력이 점점 확장되어 청나라로 국명을 바꾸자 광해왕은 더 이상 명나라에만 사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임진왜란의 참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백성들이 또다시 전란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립외교를 택했다. 명의 거센 압력으로 파병은 했으나 적극적으로 싸움에 나서지 말고 청에 항복하게 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 후 그는 청나라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명의 계속되는 재파병을 거절하는 단호함을 보이기도 했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사구시 통치만이 유일한 수단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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