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 만큼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좋은 일에도 노래, 슬픈 일에도 노래다.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불리는 노래방이 전국 곳곳에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모임프로그램에서‘여흥=노래??란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음악은 우리생활 속 깊숙이 파고들어 있다. 남녀노소, 계급, 직업을 가리지 않는다. 각종 행사 때 애국가 제창이 들어가고 학생들은 교가, 군인들은 군가, 회사원들은 사가를 부른다. 높은 곳(?)에서 민초들과 다른 삶을 사는 대통령도 노래 만큼은 예외가 아닌 듯하다. 때와 장소에 따라 대중가요, 가곡 등을 부른다. 이는 국민의 정서를 이해하고 국민들과 호흡을 함께 하려는 의도이다.

노래가 더러는 무겁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청와대 생활에 숨통을 터주며 윤활유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이다.그럼에도 역대 대통령들과 노래에 얽힌 얘기들이 그렇게 많이 공개된 편은 아니다. 정치나 행정업무와 달리 음악을 전문으로 하지 않은 대통령으로서 노래는 어디까지나 사적인 부문에서 이뤄지는 일들이 많았던 까닭이다.2002년 11월 21일 영국 BBC방송이 세계 애창곡 조사작업의 하나로 아시아지도자들의 애창곡을 방송한 적이 있다.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는 프랭크 시내트라 팬으로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함께 <마이웨이>를 애창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은 카펜터스 팬으로 <난 너를 갖고 있어(I Have You)>를 잘 부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과 함께 방송된 당시 김대중(DJ) 대통령은 가곡 <선구자>를 즐겨 부른다고 했다. 김 대통령은 자신의 험난한 정치역정을 말해주듯 질곡의 야당생활과 재야활동을 할때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가사가 그렇듯 지난날 자신의 올곧은 정치의 발자취를 말해주고 있어 DJ 하면 <선구자>를 떠올린다.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이 노래는 지금도 ‘의미 있는 가곡’으로 자주 불린다. 조두남 선생은 경남 마산에서 살다 돌아가신 원로음악인이다.김 전 대통령은 <선구자>와 함께 술자리나 흥겨운 자리에선 가끔 <목포의 눈물>을 애창, 눈길을 끌곤 한다. 자신의 고향과 가까운 목포항을 소재로 한 이 노래는 여자가수 이난영이 불러 지금까지 호남지역 대표곡이라 할 정도로 확실히 자리 매김하고 있다.김영삼 전 대통령은 특별히 즐겨부르는 애창곡은 없었지만 딱히 노래를 해야 할 자리이면 DJ 애창곡인 ‘선구자’를 자주 불렀다.

반면 최규하 전 대통령과 이승만 전 대통령은 뚜렷한 애창곡이 없어 대조를 이룬다. 역대 대통령 중 노래에 얽힌 사연이 가장 많은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그가 숨을 거둔 1979년 10월 26일 밤 청와대 옆 궁정동 시해사건 현장엔 당시 여대생가수 심수봉이 있었고 노래가 있었다. 육영수 여사를 잃은 박 전 대통령은 심수봉이 기타를 치면서 부른 <그 때 그 사람>을 들으면서 술자리를 갖다 비명이 간 것이다.‘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 언제나 말이 없는 그 사람 / 사랑의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 떠난 사람 못 잊어서 울던 그 사람~’노랫말처럼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먼저 간 부인(육 여사)을 못 잊어서 그랬을까. 박 전 대통령의 가슴 한 구석엔 늘 허전함이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박 전 대통령이 평소 즐겨 불렀던 애창곡은 <황성옛터>. 왈츠곡으로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의 이 노래는 가수 이애리수가 불렀다.

박 전 대통령은 술자리에서 이 노래를 자주 애창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 아-가엾다 이내 몸은 / 그 무엇 찾으려고 /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노래 1절 가사처럼 박 전 대통령은 나라를 잘 살게 하기 위해 밤낮으로 뛰며 그 무엇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끝없이 헤매다 세상을 떠난 셈이 됐다. ‘노래’하면 노태우 전 대통령도 빼놓을 수 없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전 음반(CD)를 냈을 만큼 가창력이 대단하다. 역대 대통령들끼리 노래자랑대회를 벌인다면 당연히 최고가수로 뽑힐 만큼 노래실력이 프로급이다. 노 전 대통령의 애창곡은 <베사메무쵸>. ‘베사메 베사메무쵸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 지던 밤에 / 베사메 베사메무쵸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 다오~’로 이어지는 이 노래는 원래 멕시코음악이다.군시절 때부터 즐겨 불렀던 이 노래는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18번 노래로 알려져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노래 말고도 여자가수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도 애창하는 편이다. 노 전 대통령이 청와대시절 해외순방에 나섰을 때 <베사메무쵸>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 중남미를 방문했을 때다. 멕시코정부가 노 전 대통령의 국빈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하던 중 청와대 쪽으로부터 정보를 입수, 노 대통령의 애창곡을 떠올렸다. 음식, 잠자리 등은 물론 춤과 노래, 정열의 나라답게 음악으로 한국손님을 기쁘게 해주자고 머리를 쓴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멕시코를 방문하던 날이었다. 국빈자격으로 행사장에 들어서자 <베사메무쵸>가 잔잔한 경음악으로 깔려나와 장내분위기가 한껏 부드러워졌다. 노 전 대통령의 입가에 한동안 미소가 흘렀다. 노래에 얽힌 이날의 얘기는 외신을 타고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베사메무쵸>는 현동주 작사, 현인 노래로 멕시코 곡을 그대로 사용해 취입된 대중가요다.

가수 현인은 부산출신으로 일본에서 정식 성악공부를 한 뒤 귀국, 대중가수로 방향을 바꿨다.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등 수많은 대중가요를 불러 우리 국민들의 애환을 달래줬다.전두환 전 대통령도 노래과 관련된 얘기들이 적잖다. 전 전 대통령의 애창곡은 <방랑시인 김삿갓>.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 흰 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로 나가는 이 노래는 그의 단골 곡이다.술자리나 기분이 좋을 땐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는 이 노래를 부를 때 끄트머리 부분에 나오는 ‘떠나가는 김삿갓’을 ‘떠나가는 전삿갓’으로 바꿔 마무리해 <방랑시인 김삿갓>은 더욱 유명해졌다.명국환이 부른 이 노래는 트로트풍으로 멜로디가 흥겹다. 김문응 작사, 전오승 작곡의 이 노래는 지금도 전 전 대통령이 회식자리 등에서 마이크를 잡았다하면 자연스럽게 뽑는 가요다.그렇다면 현직인 노무현 대통령은 무슨 노래를 즐겨 부를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작은 연인들>이다.

‘언제 우리가 만났던가 언제 우리가 헤어졌던가 / 만남도 헤어짐도 아픔이었지 가던 길 돌아서면 / 들리는 듯 들리는 듯 너의 목소리~’로 나가는 이 노래는 2002년 대선 때 화제가 됐던 대중가요다.대통령선거를 한달 정도 앞둔 그해 11월 21일 밤. 당시 민주당 노 후보는 서울 대학로 한 호프집에서 문화예술인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었다. 맥주잔이 오가고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노 후보는 직접 기타를 치며 <작은 연인들>과 함께 1980년대 운동권노래를 불러 박수를 받았다. 그는 “1980년대 노래를 얼추 다 안다”며 “노래를 배우면서 용기와 기운이 났고, 내가 길거리에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노래를 배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 후보가 <상록수>에 이어 부른 <어머니>란 노래는 ‘모순 덩어리 억압과 착취, 저 붉은 태양에 녹아버리네 /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울 때 우리의 다리 저절로 둥실 / 해방의 거리로 달려나간다. 아아 우리의 승리, 죽어간 동지의 뜨거운 눈물~’등의 가사다.

노래를 부른 노 후보 얘기는 이어졌다. “그냥 예술이 좋지만 뜻이 있는, 지향이 있는 예술은 더 좋다”며 “(집권하면) 여러분들을 청와대로 모셔 노래 한 곡 하겠다”고 말했다. 자리를 함께 했던 배우 문성근·권해효, 시인 신경림, 문학평론가 구중서, 가수 이은미, 만화가 박재동 씨 등 100여명의 문화예술인들은 기타를 치면 노래를 부른 노 후보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는 후문이다. ‘노 후보가 부른 이 노래는 젊은 층의 많은 호응을 얻어 득표에 적잖은 도움이 됐다’는 민주당캠프 쪽 사람들 분석도 대통령 만들기에 노래의 힘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라이벌이었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친구여> <사랑으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등을 애창, 운동권노래를 불렀던 노 후보와 전달하는 메시지흐름이 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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