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때의 인재들은 오직 관료가 되기 위해 과거 시험에 매달렸지만 등용문은 바늘구멍처럼 좁았다. 천신만고 끝에 과거에 급제해도 당파싸움에 까딱 줄 잘못서면 하루아침에 목이 달아났다. 제 목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애꿎은 처자식은 물론 사돈에 팔촌까지의 친척에 친구까지, 재수 없으면 안부편지 한 장 보낸 사람까지 모조리 목숨 부지키가 어려울 수 있었다.겨우 벼슬길에 올랐다가 이처럼 반대파에 밀려난 선비들은 역전의 기회를 잡기 위해 절치부심하거나, 아예 이 풍진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는 쪽으로 나뉘어졌다. 과거에 급제 못한 숱한 선비들은 세도 양반집 대문을 기웃거려서라도 어떻게 미관말직 한 자리 얻어 보겠다는 쪽과 세상 나서기를 끝내 포기해서 유유자적(悠悠自適) 하는 쪽으로 나뉘었다. 이랬으니 조선 5백 년 동안의 이 땅 팔도강산은 이래저래 사연 많은 고등실업자로 넘쳐 났을 일이다. 생각해보면 조선시대의 가장 큰 국가적 손실이자 조선인의 비애였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만약 이들이 선비 체면을 무릅쓰고 상공(商工)에 학문적 지식을 쏟아 부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눈부실 정도로 판이해졌을 터이다. 조선인으로 불린 무덤 속 우리 선조들께서는 어떤 회한을 가졌을까?우리네 한국시대를 돌이켜 보면 1960, 70년대에 반일 감정을 자극했던 지식층이 바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식 교육을 가장 충실히 받았던 세대였다. 최고의 지성임을 자타가 인정한 그들 세력이 반일의 톤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일제가 강변했던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신교육으로 황국신민의 삶을 살던 제도권 지식인들이, 일본이 연합국에 패하고 조선이 어부지리로 독립하게 되자 충격을 받았을 것은 짐작되고 남는다. 김구(金九)선생이 광복군을 이끌고 귀국한다는 소문에 밤잠을 설쳤을지 모른다. 자신에게 친일파라는 낙인이 떨어지면 그건 가족과 가문에까지 사형선고나 같았다. 새 시대에 살아남는 방법은 빨리 일제 때의 행적을 지우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인사들의 환국을 환영하는 민족주의자로 변신하는 길밖에 없었다.한국인으로 새 출발함에 있어서 어두운 과거를 드러내지 않아도 좋았던 것은 너나없이 일제에 빌붙고 충성한 전력에 서로 눈치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초대 이승만 정권도 그들 친일 지식인 그룹의 협조 없이는 정권 안보나 현실 국가 경영이 쉽지 않다는 판단을 했었다.혹 자신의 지난 행적이 드러나도 한통속들의 침묵 비호아래 같이 침묵하면 된다는 슬기도 익혔다. 다른 소수세력이 친일파를 들먹이면 시치미 떼고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지혜도 배웠다. 또 대중에게는 입으로 ‘민족주의’ ‘민주주의’만 팔면 만사 형통이었다.이렇게 시작된 한국인의 비애는 21세기 든 지금까지 진행형이다. 이는 개혁 세력이 정치적 입지를 넓히는 확실한 첫 번째 논거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 지배세력 교체론이 각광받고 과거사법이 만들어져 역사를 거꾸로 돌리자는 동의가 일어난 것도 한국인만의 비애일 것이다. 비애를 비애로 느끼지 못하면 우리는 더욱 슬픈 역사를 만들 수밖에 없다. 그 할아버지가 동족을 팔았고 그 아버지가 민족을 속였으니 그 손자가 또 그 아들이 죄인이 되어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나라. 조상 잘못 만난 죄 때문에 하늘 보기가 부끄러워 평생을 삿갓 쓰고 유리걸식했던 조선말기 때 방랑시인 김삿갓의 비애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조선시대에도 3대를 넘으면 그 자손의 연좌를 풀어주고 신원을 회복케 하는 것이 관례였다. 신한국을 화두로 삼아 21세기 도약을 준비하는 우리 한국인. 냉정한 머리, 뜨거운 가슴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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