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사참배를 시비하는 나라는 한국과 중국뿐’이라는 일본정권의 서슴없는 발언이 나왔다. 이게 8·15광복 이후 한·일 과거사 논쟁 60년의 현주소이다. 골수에 박혀있는 두 나라 사이의 뿌리 깊은 불신이 정부 간 대치로 이어져서 국민감정에 불을 지른 사건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그러나 그 같은 논쟁의 저변과 밑바닥에는 양국의 정치상황과 정치적 의도가 얽혀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일본의 국내정세가 보수화경향이 심화될 때 마찰음이 더욱 컸었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언제든 두 나라 관계를 긴장과 대결국면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과거사 문제라는 기본적 불씨가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정으로 대처할 일이 아니라는 냉정한 의식이 필요하다. 옳은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새롭게 접근치 않으면 우리는 늘 피해의식 속에서 마음의 상처를 축적할 수밖에 없다.지금의 과거사논쟁은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에만 초점이 맞춰져있다. 여기에는 일본이 이기고 한국이 패배한 기억밖에는 없다. 이렇게 되면 일본인들은 지난 역사에 저들이 승리했던 기억을 즐기면서 한층 우리를 얕볼 것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굳이 부끄러운 과거를 반추해서 얻어낼 실익이 있을지 솔직히 의문이다.그처럼 과거 죄악에 대한 반성은커녕 툭하면 상처를 들쑤시는 일본에 대응할 수단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양국관계를 통시대적으로 접근하는 분명한 방식이 있다. 삼한, 백제시절 우리민족은 일본을 동부지역 열도로 분류해 직접 통치했다.일본의 국가형성은 가야계를 중심으로 백제계, 신라계, 고구려계에 의해 주도됐다. 발해도 727년 일본을 복속시키고 926년까지 2백년 동안 조공을 받아왔다. 이때 우리 한겨레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돼 그들 문명을 밝혔다. 이는 6세기 말에서 10세기초반의 일본 문화재나 관련기록이 입증하는 바다. 그런 것이 고려이후 조선중기 사이에 일본을 등한시해서 산발적인 소규모 무역교류만하고 상국(上國)으로서의 조공을 받았을 뿐이다.고려말에 이르러서는 대마도 등 일본 해안세력의 해적질이 자심해지자 급기야 고려정부가 대마도를 정벌했다. 특히 조선초기에는 일본해적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1396년, 1419년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대마도 정벌에 나서 왜구가 다시는 준동할 수 없도록 했다. 1420년 세종대왕은 다시 한번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고 대마도를 경상감사의 지휘권에 두었다.실제로 조선을 상국으로 생각한 대마도에서는 풍신수길의 조선침략계획을 조선조정에 알려오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조선조정은 방심했고, 일본을 평정한 풍신수길은 내적인 갈등을 풀기 위해 조선침략을 강행한 것이다. 7년 만에 패주한 일본이 약탈해간 엄청난 양의 문화재와 포로 및 국가재산은 하나도 돌려받지 못했다. 전승국으로서의 한일관계를 주도할 생각도 안했고, 침략자에 대한 어떤 응징도 없었다.침략전쟁에 패하고도 막대한 전리품을 챙겨간 이런 버릇이 일본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키워놓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난 일본은 조선과의 국교를 단절했다가 도꾸가와가 집권하면서 ‘사대교린책’으로 다시 조선정부에 접근을 시도했다. 새로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되고 19세기 초반까지 이런 관계는 지속됐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 미국의 함포외교로 개항한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내정혼란으로 쇠퇴해진 조선조정을 협박해서 끝내 조정의 문을 닫게 만들었다. 새삼스럽게 국치과정을 소개하는 것은 저들 인면수심의 본질을 알자는 뜻이다. 저들의 국가 형성과정과 문화 발전과정에 우리한민족의 은혜적 역할을 빼고나면 일본의 민족문화는 침략과 수탈근성 외에 내놓을 게 없다.배우고, 구걸하고, 뺏은 민족과 가르치고, 베풀고, 빼앗겼던 민족, 한국과 일본의 통시대적 역사는 이렇게 점철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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