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거리’란 말은 명사 패(牌)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패’는 몇 사람이 어울려 있는 동아리를 뜻한다.태고 이래 우리 인간은 혼자 힘만으로 살수 없는 까닭에 끼리끼리 패를 만들어 힘을 모으는 지혜를 발휘했다. 이렇게 패를 모아 서로 의지하려는 습성은 가난하고 힘든 세상에 사는 민족일수록 더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는 분위기가 아주 살벌하다가도 상대방이 자신과 같은 고향이라거나, 같은 학교를 다녔든지 또는 종씨라는 것만 확인돼도 금방 태도가 달라진다.그래서 우리 사회는 무슨 일이 생기면 해결 방법으로 맨 먼저 그 일에 영향권있는 사람과의 연고를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구직희망자가 어디 입사시험이라도 치면 면접시험 통과를 위해 회사 고위층과의 연줄을 찾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적잖이 봐왔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아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관대해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는 공격적이거나 철저히 잔인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의 발로라고 할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안면몰수’라는 말이 저승사자의 그것처럼 으스스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사회가 우리 말고 어디 또 있을 것 같지가 않다.사회가 신분적 위계질서로 굴러가던 조선조 사회에서 지배계급은 지배구조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 양반외의 신분에는 가혹할 만큼 배타적이었다. 또 양반계급끼리는 제한돼 있는 벼슬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툼이 치열했는데, 이때 패거리는 매우 중요했다. 패거리에 들면 출세가 보장된다. 때문에 명문세도가 사랑채에는 식객이 들끓었다.어느 쪽에 줄을 섰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뀔 수 있었기에 양반들에게는 이 식객코스가 필수적 과정이었다. 지금의 ‘측근실세’니 ‘가신’이니 하는 원조쯤이라고나 할까,법이나 사회적 원칙보다 더 위력을 발휘한 강력한 연고주의, 끼리끼리 문화는 우리 사회를 오늘같이 만들어 놓기에 모자람 없는 조건이었다. 망국적 병리현상이라는 지역주의는 연고주의의 한 부분적 현상일 뿐이다. 뿌리 깊은 관례가 된 ‘전관예우’, 고위직 퇴직자 ‘모셔가기’해서 대관청 로비에 이용하는 기업풍토, 이 모두에서 연고 및 안면을 통해 문제를 해결코자하는 사회구조가 여실히 나타난다.하드웨어를 바꿨다고 소프트웨어까지 자동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제도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지만 사회문화가 개혁되지 않고서는 일정 지배세력을 교체하는 효과만 낼 따름이다. 지금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정치혁명 아닌 사회문화의 혁명이다. 끼리끼리 패거리문화에는 합리성과 합목적성이 결여되기 마련이다. 그러면 페어플레이 사회가 아니다. 페어플레이를 하지 못 하고 패거리에 의해 억눌리고 빼앗겼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는데 아무리 민주절차를 강변해본들 씨알이 먹힐 턱 없다.패거리문화는 패거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필연적 충성경쟁을 부른다. 튀기 위해 막말에 막가는 행동을 전가의 보도인양 휘두르는 딱한 모습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상생을 위한 이성적 목소리는 코드를 벗어난 기회주의로 매도당하기가 십상이다.이렇게 되면 집권세도가가 편들고 두둔하는 패거리가 목소리를 높이고 날을 세우는 역사의 반전 현상을 멈출 수가 없다. 짓눌린 패거리가 이 정권이 끝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이 땅의 ‘끼리끼리’문화를 척살코자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를 사람이 누구인가. 이래서 우리 사회의 패거리문화는 영구불멸일 것이라는 섬뜩한 생각을 거둘 수가 없다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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