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학교 청소년 집단의 이른바 ‘왕따’ 실태가 아주 심각한 학내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우리사회가 온통 들끓었었다. 왕따를 견디지 못해 정신질환을 일으키고 심지어 어린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까지 하는 참담한 사건이 보도됐을 때마다 우리는 가해학생들의 잔혹함에 치를 떨곤 했었다.피해학생이 홀로 감당해야했던 그 엄청난 고통이 눈에 보이는 듯도 했다. 그래서 한반 친구를 왕따시킨 얼굴모르는 다수의 가해학생들을 향해 모진 비난을 퍼부은 게 사실이다.그런데 정작 경찰에 붙잡혀온 가해학생들의 음성변조된 화면상의 말투는 단지 겁에 질렸을 뿐이지 도무지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지가 않아 더욱 분개해했던 기억이 없지 않다. ‘다른 애들이 하니까 따라서했다’거나 ‘그냥 장난으로 했다’는 것, 또는 ‘괜히 하는 짓이 미워서’나 ‘나보다 약해보여서’라는 게 왕따시키고 당하는 이유의 전부였다.말하자면 ‘짱’으로 통하는 영향력 있는 아이를 필두로 주변 아이들이 피해학생을 따돌리고 괴롭히니까 따라서 맞장구를 쳤다는 이야기다. 또 그렇게 해도 당한 학생이 어떤 식으로든지 저항할 생각을 못하고 그저 아이들 눈치 살피며 설설기는 것을 즐겼다는 속내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대단히 유감스런 얘기 같지만 왕따 당하는 학생에게도 전혀 문제없다고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나약해보이고 영악해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일은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여러 가지 사회성이 부족한 측면 탓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또래끼리의 동료의식을 얻지 못하는 점일 테다.성인 조직사회도 다를 게 없지 싶다. 같은 조직의 사람이 매사에 자기만이 선(善)임을 내세우면서 남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 함께 하는 일에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자세, 공동의 피해를 유발시키는 행위, 대체로 이런 것들이 동료의식을 파괴케 하는 주된 원인일 것이다. 같은 입장에서 동료대열에 들지 못하면 ‘왕따’되기가 십상이다. 그럼 주위가 온통 적으로 비춰질 것이 뻔하다. 이렇게 적대감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에게 자기 가족 외에 믿는 사람이 생겨날리 없다. 세상은 더한층 이런 그를 얕봐서 만만하게만 여길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조직을 지배하려는 야심이 있는 자에게는 사람들의 마음을 고루 사는 것 더 이상의 힘이 필요치 않다. 국가 간의 문제에서도 상대국 통치자가 어쩌다 자국의 민심을 잃게 되면 그 기회를 놓치려들지 않을 것이다. 국민이 갈라지면 국론이 분열되는 이치가 변할 리 만무하다. 이런 때 국가적 이해관계에 몰려있는 각국들이 어떤 생각과 판단을 할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상대국들이 너도나도 얕봐서 오만하게 굴 것이다.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일본, 미국, 중국, 북한과의 근자관계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일본의 오만방자함이 점입가경을 이루는 것이 꼭 구한말(舊韓末)때의 일제 망령이 살아온 듯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작심한 발언을 놓고도 우리국민더러 들으라는 듯이 ‘국내용’ 운운하고 ‘후회할 날이 올 것’이라는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분노하는 우리모습이 오히려 초라해질 노릇이다.어쩌다가 이 땅 대한민국이 이 꼴로까지 얕보이게 됐는지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이래도 이 나라 정치집단이 자기집단의 이익을 희생할 마음이 없다면 국민은 국민의 처지를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질지도 모를 일이다. 외교전에서나 국내문제에나 내가 선이라고 내세우기보다 자국민의 전폭적 지지와 동의를 확보하는 길이 훨씬 효과적이고 위력적이라는 사실은 고금의 역사가 일군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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