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11월 늦가을로 접어들고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짐에 따라 우리는 지난봄에 넣어뒀던 솜이불 같은 두꺼운 이불을 다시 꺼내기 시작했다. 하긴 솜이불 보다 훨씬 가볍고 따뜻한 양털이나 오리털 이불이 각광받는 시대에 웬 솜이불 타령일까 싶기도 하다
고려 말 문익점선생에 의해 이 땅에 목화가 들어오기 이전까지 우리 선조들이 깔고 덮으며 살았던 이불은 식물성의 ‘부들꽃섬’으로 만든 포화이불이 주였다고 한다. 이른 가을에 부들꽃을 따다 푸욱 삶아서 벌레가 생기지 않게 하고 활로 타서 이불솜을 삼은 것이다. 한때 이 땅 선조들에게 있어 이불이 ‘사상’을 표하기도 했다. 선비들이 들풀로 얽은 야초라(野草羅)에 갈대꽃 솜을 놓아 만든 이불을 둘러쓰고 있으면 절의를 지키는 의지로 나타난 적이 있다.

이는 청절을 지키다 죽은 노나라의 금루 선생이 갈대꽃 이불을 둘러쓴 채 앉아서 죽었는데, 이불을 벗겨내자 죽어서까지 놓지 않던 이불자락을 그때야 놓고서 가로 누웠다는 ‘지조’에 관한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라시대 때의 종이 만드는 닥나무 섬유 이불솜도 있었고, 헌 책장을 갈기갈기 찢어 푸석푸석하게 부풀게 해서 만든 종이 이불도 오랜 세월 전해 내려졌다.

청빈하기로 이름난 세조 때 학자 김수온이 종이요를 깔고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고 변방의 군사들에게도 이 종이 솜옷과 종이 이불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 기방의 기생들이 자신이 시를 쓴 종이로 솜을 만들어 정인에게 이불을 지어 보내기도 했었다는 낭만의 역사까지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때도 왕실이나 상류 사회에서는 누에고치를 풀어서 만든 사치스런 풀솜 이불을 덮고 살았다. 때문에 애지중지 과보호하여 기른 아이를 ‘풀솜에 싸서 키운 아이’로 빗대 부르기도 했던 터다. 이렇게 이불은 우리 인간 생활에 떼 놓지 못할 필수항목이다. 특히 날씨가 차가워지면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우리사회에 지난 IMF경제 난국을 계기로 생겨난 노숙자들이 IMF 졸업 후에 오히려 더 늘어나는 추세다. 지하철 등 역사나 지하도에서 신문지를 이불 삼아 밤잠을 청하는 노숙자들 모습이 조금도 낯 설 지가 않다. 정상 서민 가정에서도 변변한 이불조차 없이 추운 밤을 식구들 체온에 의지해서 지새우는 불우한 이웃이 적지만 않을 현 나라 상황이다. 가진 자들 사회에선 꿈에도 상상 못할 이 절대빈곤의 참상이 얼마만큼이나 우리사회를 각박하게 하는지를 그들은 모를 것이다.

민생을 대변한다는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권을 빌미로 피감기관으로부터 고액의 으슥한 단란주점 접대를 받고 ‘풀솜이불’처럼 따뜻한 밤(?)을 보낸 사실이 탄로 나서 한창 말썽이다. 국회의원들 역시 가진 자들 축에 끼어 추운 날씨에 떠는 가진 것 없는 고통과 설움 따위가 전혀 와 닿지가 않을뿐더러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앞으로 검찰수사 결론을 지켜봐야 할 것이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만으로도 해당 의원들이 마땅히 의원직을 내놓고 국민께 석고대죄를 청함이 옳을 것 같다.

우리사회의 심화된 양극화 현상은 갈수록 심각하다. ‘있는 자’와 ‘권력자’에 대한 적대감이 무슨 일을 일으킬지 모를 불안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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