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홍준철 편집위원]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정중동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비서실장 시절만 해도 잠룡군으로 분류돼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을 받았던 그다. 임 전 실장의 최근 행보는 지난 6월 10일 종로구 평창동 이사다. 종로 출마설로 출마를 굳혔다는 언론 보도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종로는 전 국회의장 출신인 정세균 의원이 버티고 있다. 정 의원이 거취에 따라 임 전 실장의 출마여부도 결정날 공산이 높다. 문제는 정 의원이 차기 대권 출마 의지가 있어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자칫하면 임 전 실장이 총선 출마는 물 건너가고 ‘야인’생활이 길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 ‘정치 1번지’ 종로 이사는 갔지만 대권 뜻 있는 정세균 버텨
- 나경원 지역구는 ‘패륜공천’ 전력 부담… 불출마 가능성도
유력 정치인들이 종로를 선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청와대를 품고 있는 종로에 당선된 경우 차기 대권가도에서 유력한 주자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도 종로에서 재보궐 선거에 당선됐지만 6개월 만에 종로를 뒤로하고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험지인 부산으로 지역구를 옮겨갔기 때문이다.
또한 종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15대 총선에서 ‘청문회 스타’인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상대로 승리한 지역이기도 하다. 물론 이 전 대통령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에서 자진사퇴하면서 노 전 대통령이 재보궐을 통해 당선될 수 있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까지 3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종로다. 당연히 대권 꿈이 있는 유력한 인사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차’떼고 ‘포’떼니 갈 곳은 종로만 남아
보수 후보 중 차기 대권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1위를 달리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범진보 진영에서 1위를 달리는 이낙연 총리가 내년 총선에서 종로 출마를 종용받는 이유다. 최근에는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장고 끝에 종로 평창동으로 이사를 갔다. 사실상 종로 출마를 굳혔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정치권에선 그동안 임 전 실장의 출마 예상지역으로 종로를 비롯해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의 지역구인 동작을과 은평을 그리고 중구·성동을을 꼽았다. 은평을의 경우 지난 20대 총선에서 출마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같은 당 소속 강병원 의원에게 경선에서 패한 아픈 기억도 동시에 있다. 재차 같은 당 소속 의원과 경합을 벌여야 한다는 점도 부담이지만 경선에서 또 질 경우 사실상 차기 대권도전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성동구는 자신의 모교인 한양대가 위치해 있고 재선을 한 지역으로 당선이 유력한 지역이다. 중구와 선거구가 합쳐지면서 중구·성동갑의 경우 민주당 소속 홍익표 의원이 터를 잡고 있다. 한양대가 소재한 이 지역은 같은 당 동료 의원과 경합을 벌여야 한다는 점이 부담이다.
하지만 중구·성동을의 경우 바른미래당 지상욱 의원의 지역이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면서 정치적 위상인 높아진 임 전 실장 입장에서 공천을 받을 경우 당선을 기대할 수 있는 지역이다. 하지만 ‘험지’가 아닌 ‘이지고잉’(easy-going)으로 차기 리더로서 꽃길만 걷는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임 전 실장이 종로 이사를 가기 전 막판으로 거론된 지역이 나경원 원내대표가 있는 동작을이다. 나 원내대표는 자유한국당의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이자 서울시장직에 도전한 바 있는 거물급 인사다.
동작을 지역 역대 총선을 봐도 임 전 실장이 도전할 만한 험지로 분류할 수 있다. 나 원내대표 전에는 정몽준 전 의원이 재선을 한 지역이다.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는 18대 총선에서 정 전 의원에게 도전했다가 패한 지역이다.
나 원내대표 역시 중구에서 동작을에 터를 잡을 당시 맞상대가 ‘스타급 정치인’ 고 노회찬의원이었다. 임 전 실장의 입장에서는 ‘험지’로 규정할 수 있고 당선될 경우 정치적 위상도 높아질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대학 후배이자 운동권 후배인 강희용 전 정무조정실장이 지역위원장으로 있다는 점이다. 임 전 실장은 한양대 무기재료공학과 86학번이고 강 위원장은 정치외교학과 90학번이다. 강 위원장이 나 원내대표에 맞서 인지도나 무게감이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지역을 다지고 있는 후배와 경선을 하는 것은 정치적 도리가 아니라는 게 임 전 실장의 입장이다.
특히 동작을의 경우 ‘패륜공천’이라는 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지역이다. 나 원내대표가 노회찬 의원에게 맞서 승리한 2014년 7.30 재보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 전신) 후보로 기동민 의원이 공천을 받았다. 박원순 사람으로 ‘박원순 후광효과’를 노린 전략공천이었다. 그런데 당시 동작을은 허동준 지역위원장이 터를 잡고 있었다.
날벼락을 받은 허 위원장은 기 의원 출마 기자회견장에서 나타나 “당이 패륜공천을 했다”고 울분을 터트렸다. 공교롭게도 두 인사는 ‘운동권 23년 지기’ 친구였다. 정치권에서 ‘공천 앞에는 친구도 동지도 없다’는 말이 나왔다. 기 의원 역시 정의당 노회찬 의원에게 단일화를 해주고 출마를 접었다. 노 의원은 나 원내대표에게 패해 ‘패륜공천’의 끝은 민주당에게 참담함을 안겨줬다. 임 전 실장이 동작을에 나설 수 없는 또 다른 배경이다.
결국 임 전 실장의 최종 선택지는 종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종로 출마 역시 임 전 실장의 뜻대로 될지는 미지수다. 종로는 정세균 의원이 터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임 전 실장측에서는 전 국회의장을 지낸 인사로서 차기 총선 출마를 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평창동 이사했지만...’丁, 종로구민 재지지율 51.2%
또한 임 전 실장 측에서는 중앙당의 전략공천은 없고 현역은 무조건 경선을 치러야 한다는 원칙으로 막상 경선이 진행될 경우 전 국회의장을 지낸 정 의원이 후배와 경선을 하지 않고 양보할 것을 내심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정 의원은 ‘지역구 주민과 당과 협의해 결정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돌아가는 모습은 불출마나 양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일단 6월10일 임종석 전 실장이 이사를 온 지 일주일도 안 된 6월 15일 종로구 구민 51.2%가 낸 총선에서 정 의원을 재지지할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쿠키뉴스와 조원씨앤아이가 공동으로 2019년 6월 7일부터 9일까지 사흘간, 종로구 거주 만19세 이상 남녀를 대상으로 ARS 여론조사를 실시, 표본수 501명,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4.4%p. 그 밖의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임 전 실장 입장에서 반가운 뉴스일 리가 없다. 이뿐만 아니다. 정 의원은 6월18일 전북 지역신문 기자들과 식사를 했다. 그런데 한 지역지가 ‘정세균 전 의장, 내년 총선 종로구 출마 가닥’으로 제목을 뽑아 내보냈다. 정 의원실에서는 ‘그런 말 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해당 지역지는 따옴표까지 넣어 지면으로 내보냈다.
전북일보 6월18일자 기사를 보면 정 의원은 “국회의장 시절 분권형 개헌을 통과시키지 못한 과제가 남아 있다”며 “다음 대선을 앞두고 개헌의 동력을 모으고 싶다”고 밝혔다. 또한 정 의원은 “국회의장을 지낸 후 불출마가 관례라고 하지만 박준규·황낙주·임나섭·이효상 전 의장 등 출마한 사례가 있다”며 “아직 자리를 내려놓기 이르다”고 덧붙였다.
특히 정 의원은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종로로 출마하면 참 고마울 것 같다”고 밝혀 사실상 종로 출마를 선언한 것처럼 보도했다. 이에 대해 정 의원실에서는 “의장님이 ‘출마한다고 말 한 적이 없다’고 확인해 줬다”며 “지역지가 오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지역지 보도 이후 관련 문의전화가 의원실로 쇄도했다는 후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지난 6월23일에는 정 의원이 황교안 당 대표와 만나 화제가 됐다. 정 의원과 황 대표가 만난 자리는 민주당 민병두 의원의 모친상에서였다. 두 인사는 장례식장에서 조우해 30여 분간 대화를 나눴다. 정치권에서는 내년 총선 최대 격전지인 서울 종로 지역에서 여야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두 인사가 만났다고 주목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임 전 실장의 가슴은 타들어갈 수밖에 없다. 정 의원의 왕성한 활동에 차기 총선과 대권 도전을 염두에 둔 행보로 읽히기 때문이다. 임 전 실장 역시 차기나 차차기 대권 도전을 위해서는 종로 출마가 불가피하다.
만약 중앙당에서 교통정리를 해주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정 의원의 바람대로 황교안 대표가 출마할 경우 정 의원과 경선을 해야 한다. 그러나 경선은 해보나 마나다. 일단 7월 말까지 권리당원 모집 마감일인데 임 전 실장은 이사 온 지 한 달도 안 됐다. 또한 최근 종로구민 여론조사를 보면 재지지율이 50%이상으로 권리당원뿐만 아니라 여론조사 경선에서도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지역구 활동을 열심히 할 형편도 되지 못한다. 정 의원이 지역구를 지키고 있는 이상 공중전은 가능하지만 지역민 바닥을 다지는 지상전은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여권에서는 임 전 실장이 정 의원과 경선을 하느니 출마를 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종로구민의 경우 자존심이 센 지역으로 스타급 정치인이 온다고 해서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지역이다. 대표적인 인사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다. 자유한국당 내 잠룡군으로 분류되는 오 전 시장도 지난 20대 총선에서 바닥을 훑다시피 한 정 의원에게 커다란 격차로 패했다. 정 의원은 민주당 내 유력한 대권 주자도 아니었지만 지역 밀착형 선거운동으로 당선됐다.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 볼 수도...”
오죽하면 차기 대권을 노리는 오 전 서울시장이 ‘정치1번지’ 종로를 포기하고 ‘험지’를 내세워 추미애 당대표가 있는 광진을로 지역구를 바꾼 배경에 정 의원의 아성이 워낙 높았기 때문이라는 평이 나올 정도다.
결국 임 전 실장의 운명은 정 의원의 거취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게 됐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정 의원이 장고 끝에 황 대표 출마가 유력해 출마선언을 할 경우다. 이럴 경우 임 전 실장은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보는’ 신세로 전락할 공산이 높다. 황 대표가 나서지 않더라고 대선 주자급 인물이 올 경우 대권 도전 의지가 있는 정 의원이 쉽게 양보할 리가 없다.
이럴 경우 임 전 실장은 다른 지역에 출마할 수도 없다.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총선에 나서지 못할 수도 있는 셈이다. 종로에 일단 이사를 왔지만 대놓고 움직일 수도 움직이지 않을 수도 없는 임 전 실장의 딜레마가 그의 ‘정중동 행보’를 만드는 이유일 공산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