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009년 10월 26일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 꼭 30년 된 날이다. 박 전 대통령에 의한 정치적 탄압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도 올해 그 생을 마감했다. 김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실시했던 역대 대통령에 대한 국민 평가 여론조사 결과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가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응답이 과반이 넘었다.

한국 현대사가 독재 시도와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얼룩져 있는 점을 생각하면 이같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 평가는 분명히 새겨 볼만한 대목이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군의 정규 육사 출신으로 한반도 지배의 선봉에 섰던 인물임을 모르는 국민이 없다. 그는 일본 괴뢰 정부의 만주 신경군관학교 우수 졸업자에게 주어지는 특전에 의해 일본 육사 57기 유학생대의 3학년에 편입했다. 2년 후인 1944년 7월 유학생대 3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황군 육군소위에 임관했다.

해방이후 그는 조선 광복군에 가입하여 1946년 남한으로 돌아왔다. 이후 창설된 한국군의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면서 남로당 프락치 역할을 하다가 체포됐다. 당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군부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있는 대로 실토해서 목숨을 구한 뒤 강제 예편 당했다. 이후 6.25 전쟁 덕에 현직에 복귀한 그는 제2공화국의 혼란기를 틈타 1961년 5월 16일 미명을 기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국정부의 쿠데타 진압 결정으로 실패할 뻔 했던 이날의 쿠데타를 성공시킨 사실상의 일등공신은 놀랍게도 겁 많고 무능했던 당시 내각책임제의 장면총리였다. 혜화동 수녀원에 숨어있던 장면 총리가 어떤 진압 시도도 하지 않은 덕이었다. 이로부터 이 땅에 군사 독재시대가 열리고 1972년 10월 17일엔 종신 대통령제를 골자로 한 유신헌법이 공포돼 만7년 동안의 정치 암흑기를 맞아야 했다.

박 전 대통령의 이런 역사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국민 평가가 매우 긍정적인 것은 그가 한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는 북한보다 훨씬 못사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를 국민소득 76불에서 1500불에 이르도록 한강의 기적으로까지 표현된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전 세계를 깜짝 놀라도록 만들었다.

대학시절 군사 정권을 혐오해서 ‘독재타도’를 외치다 유치장 맛을 본 필자가 1971년 대선에서 DJ를 지지한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 후 점차 필자사고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건 나태한 국민들에게 잠재력을 일깨워주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신념을 갖게 한 지도자의 강임함과 고독함이 함께 배인 인간 박정희의 여린 모습을 발견하고서였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뻔하다. 그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을 해서 독재를 하고 일부 인권유린 행위를 자행 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상당한 동의를 안 할 수 없지만 쿠데타 당시의 나라사정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학생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후 각종 단체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 농민 상인, 학생, 어느 계층 할 것 없이 모두가 길거리로 몰려나와 데모 천국을 이루었다. 심지어 학생들이 머리 기르자는 데모에 초등학생과 선생들까지 수업 줄이자는 데모를 하고 나서는 나라꼴이었다.

깡패가 주먹으로 정치에 입문하고. 모든 파괴 행위를 자유로 강변하던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회환을 알기나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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