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언 전 의원의 회고록이 정치권을 흔들고 있다. 그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은 현대사 20여년간의 정치비사를 담고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또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권부 막후의 적나라한 실상을 담고 있어 정치권에 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5공과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등 격동의 현대사 한 가운데 서 있었던 박 전 의원. 다음은 그의 회고록 중 일부 내용을 발췌,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주-

<5공 초기 ‘스리 허’의 야심과 실각>
막강 실세 허화평과의 세 번에 걸친 충돌

80년 10월 박철언 전 의원은 검사직을 유지한 채 정무비서관으로 청와대에 파견된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은 허화평 비서실 보좌관, 허삼수 사정수석비서관, 이학봉 민정수석비서관 등 육사 17·18기 출신의 신군부 주체들과 허삼수의 부산고 동기동창인 허문도 정무1비서관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 중 대통령 비서실 전체를 좌우하는 인물은 바로 허화평 보좌관. 박 전 의원은 허 보좌관과 세 번에 걸쳐 충돌한다. 첫 번째는 박 전 의원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빠른 계엄 해제를 건의하자 허 보좌관이 강력 반대하고 나선 것. 두 번째 갈등은 차기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두고 빚어졌다. 박 전 의원은 당시 이종원 대구고검장을 밀었고 허 보좌관을 비롯한 ‘스리 허’가 이를 가로 막고 나섰다. 결국 전 전 대통령은 계엄 해제건과 함께 박 전 의원의 손을 들어줬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갈등은 ‘이철희·장영자 사건’. 장영자는 전 전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당시 광업진흥공사 사장)의 처제였다. 스리 허는 언론플레이로 전 전 대통령을 몰아세웠고, 이규광은 구속됐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허화평(당시 정무1수석비서관)·허삼수는 전격 경질됐다.

<‘학원안정법’ 파동의 숨겨진 진상>
전두환·장세동이 주인공, 허문도는 조연

85년 여름, 일부 언론에 정부·여당에서 ‘학원안정법’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20일 후 문교부는 학원안정법 시안을 제출했다. 여당에서조차 공개적으로 법안 제정에 반대하고 나서면서 정국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금까지 학원안정법의 주역은 허문도 정무1수석비서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조역에 불과했으며 실제 파동의 중심에는 전 전 대통령과 장세동 안기부장이 자리 잡고 있다. 서울 미국문화원이 점거되자 장 부장은 학원안정법 제정을 위한 정권적 차원의 준비를 시작했으며, 전 전 대통령은 법안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까지 내렸다. 결국 학원안정법은 김영삼(YS)·김대중(DJ)과의 충돌을 불러왔다. 민추협의 공동의장 자격으로 제1야당인 신민당을 조종하고 있었던 그들에게 학원안정법은 학생 운동권에 본격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던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은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 이만섭 국민당 총재와의 연속 회동을 연출하며 모양 좋은 후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5공 청산’을 둘러싼 전두환vs노태우 공방>
‘5공 정치자금’ 총선 때 1500억원, 대선 때 1800억원

88년 4월 총선은 민정당의 참패로 끝났다. 과반수에 25석이나 모자라는 125석에 불과했다. 여소야대 정국을 계기로 ‘5공 청산’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점차 커지고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은 5공 청산에 격앙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했는데 사과와 변명, 재산 헌납에 낙향을 요구하는 것은 죽어달라고 하는 것보다 더한 짓이라고. “차라리 암살범을 시켜 후임자가 선임자를 죽이는 것이 깨끗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의 친인척 구속은 멈추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88년 11월18일 박 전 의원 부부와의 만찬에서 “위기에 찬스가 있듯이 전두환 대통령 문제와 연계해서 국민들이 불안의식 속에 있을 때 5공 비리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 날 5공 정치자금을 관리하던 이양우 변호사에 따르면 85년 총선 때 1,000억~1,500억원 정도가 지출됐다. 그는 87년 대선 이전까지 1,000억원 원금에 이자 800억원 등 도합 1,800억원 정도를 관리하고 있었다.

<3당 통합을 위한 물밑 협상 전모>
YS에게 40억+α 직접 전달

90년 1월 3당 합당을 전후해 노 전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박 전 의원은 YS에게 ‘40억원+α’의 정치자금을 전달했다. 박 전 의원은 YS가 소련 방문을 앞둔 89년 5월30일에 노 전 대통령의 지시로 김현철의 상도동 아파트에서 YS에게 20억원과 여비 2만달러를 전달했다. 20억원은 신한은행 본점에서 발행된 1억원짜리 수표 20매였다. 또 89년 12월20일 저녁에도 아파트 내실에서 연말 성의 표시로 한국상업은행 발행 1,000만원짜리 수표 100장으로 10억원을 건넸다. 이어 3당 합당 발표 직후인 90년 1월24일 설 연휴를 앞두고 상도동에서 YS에게 10억원을 전달했다.

“YS가 고르비를 만나 수교협상 끝냈다고?”

1990년 2월28일 민자당 최고위원이었던 YS는 청와대 회동에서 자신의 소련 방문 때 박 전 의원(당시 정무1 장관)을 동행하게 해달라고 조르다시피 건의했다. 당시 박 전 의원은 소련과의 수교를 위해 비밀 협상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었을 무렵이다. 소련에 도착한 직후 국내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YS가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 수교를 타결했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고. 나중에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프리마코프 의장실에 들렀다가 퇴청하는 길에 그 부속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YS와 선 채로 악수하고 몇 마디 나누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YS 대통령 만들기’와 민정계 5인방>
김윤환 서동권 금진호 이원조 이병기

1991년 가을, 노 전 대통령은 YS에게 “당신밖에 없다”며 대통령직 후계를 약속했다. 항간에 노 대통령의 최종 결정에는 민정계 요인 5인의 결정적인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과 고교 동창생인 김윤환은 킹메이커를 자처하며 정치권의 대세론으로 분위기를 몰았고, 안기부장이었던 서동권은 노 전 대통령과 YS에게 각종 정보를 제공했다. 금진호 내외는 노 전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서, 이원조는 오랜 친구로서 도왔다. 김현철의 경복고 13년 선배인 이병기는 노 전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민감한 사항들을 김 전 대통령에게도 전했다. 문민의 정부 들어 김윤환은 정무장관, 당 사무총장, 대표위원을 지냈고, 서동권은 통일고문, 이병기는 안기부장 2특보와 안기부 2차장을 지냈다.

김우중, 88년 총선 때 큰 돈 건네

88년 4·26 총선을 앞두고 김우중 회장이 만나자고 해 만나니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약소하지만 고생하는 직원들 회식이나 시켜주시라”고 해 받았다.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니 직원 50여명이 회식을 몇 백번 하고도 남을 큰 돈이었다. 다음날 김 회장을 다시 만나 봉투를 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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