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대표팀 주장 ‘거미손’ 이운재. 그는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침착성과 대담성으로 국가대표팀 골문을 책임지고 있다. 그는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골키퍼이다. 182cm, 82kg의 듬직한 체격, 정확한 상황 판단, 어떤 돌발 상황에서도 반사적으로 골을 막는다, 2002 한·일 월드컵 4강의 주역으로서 코칭스태프의 두터운 신뢰를 얻어 이번 2006독일 월드컵에서도 태극전사의 주전 수문장으로 골문을 지키고 있다. 이운재는 결정적인 1대1 실점 위기에서도 멋진 선방으로 위기를 넘기는 순발력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일부에서는 몸이 불었다며 굼뜨다고 비아냥 거리기도 하지만 이운재의 몸놀림은 제비처럼 가볍다.




육상선수로 운동 시작

가난한 어린 시절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국가대표 골키퍼가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곁에서 지켜봐 온 가족들에게 이운재는 이제 자랑이자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자랑스러운 수문장이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축구부에 들었던 초등학교 시절, 청주 청남초등학교 5학년 때 육상(공던지기)에서 축구로 바꾼 이운재는 공격수로 활약했으나 청주상고 1학년 때 골키퍼로 변신했다. 뛰는 게 느려 달리기할 때마다 팀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게 되다보니 일찌감치 골키퍼로 전향한 것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감독에게 반기를 들고 집단으로 훈련소를 빠져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우직하게 골키퍼 한우물만을 판 끝에 대학교 3학년 때 처음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경희대 재학시절인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출전한 뒤 그는 1994년 미국 월드컵 독일전서 후반에 깜짝 투입돼 45분간 무실점으로 주목받았다. 굴곡은 있었지만 그는 골키퍼로 이름을 날리는 선수였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그는 대표팀에서 탈락됐다. 대표팀 탈락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 그 해 대학선수권대회에서 그는 이례적으로 골키퍼로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던 비쇼베츠가 그를 찾아와 살을 빼면 국가대표팀에 받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정말 뛰고 싶으면 체중을 빼고 오라’는 게 그의 주문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살인적인 다이어트를 감행했다. 보통 사람의 1/3 정도로 식사량을 줄였다. 많이 먹었다 싶은 날은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토해냈다. 그리고 운동량을 늘렸다. 그 고생을 한 덕에 10kg 가까이 몸무게를 뺄 수 있었고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그러나 살인적인 다이어트는 그에게 긴 후유증을 남겼다. 어렵게 원정경기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그에게 폐결핵 3기 진단을 내렸다. 그로부터 2년여, 그는 폐결핵 치료를 위해 운동에 전념할 수 없었다.

끔찍했던 ‘병마와의 전쟁’

이운재는 대학을 졸업한 1996년 신생팀 수원 삼성의 유니폼을 입고 국내 프로무대에 데뷔, 선수생활의 황금기를 꽃피울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이운재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간염 판단을 받고 다시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줄곧 병상에서 지낸 것은 아니지만 운동과 치료를 병행하는 게 쉽지 않았다. 골문도 청주상고 대선배인 박철우에게 자주 내주다보니 기량은 자꾸 줄어드는 것 같았고 이쯤에서 선수생활을 접고 싶은 생각도 고개를 들곤 했다. 그러나 이운재는 축구가 좋아서 무작정 축구부에 가입했던 초등학교 5학년때의 기억이며 태극마크를 처음 달았을 때의 뿌듯함 등을 되살리며 축구화를 벗지 않았다. 그러기를 2년. 마침내 이운재는 지긋지긋한 병마로부터 완전히 벗어났고 1998년부터 다시 축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2년 반 만에 다시 태극마크를 다는 감격을 누렸다. 그 후 선배 김병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그는 부동의 국가대표 골키퍼로 자리매김했다. 이운재는 “특히 아버지께서 좋아하세요. 월드컵 덕에 제가 좀 알려지면서 기를 펴고 사시니까요. 고생을 많이 하셨거든요. 아버지는 일용노동자로 자식 다섯을 키우셨고, 어머니는 제 합숙비를 마련하려고 공장 막일도 마다하지 않으셨어요. 그동안 없이 산다는 이유로 무시당한 적도 좀 있으셨나 봐요. 지금은 좋죠. 동네 경로당에 가셔서 친구분들 술 사주는 재미로 사세요.” 부모에게 자랑이 되는 자식이 되는 것만큼 큰 효도가 어디 있을까. 부모의 만족한 모습에서 그는 지금까지의 고생을 보상받는다. 돌이켜보면 축구를 시작한 뒤 그는 ‘대표팀 주전 골키퍼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2002년 월드컵은 그런 그에게 주어진 천금같은 기회였고, 그는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 한순간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해 왔다. 그래서 그는 ‘이기려면 기다리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저는 화려한 골키퍼보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골키퍼가 좋습니다. 화려한 건 언젠가는 꺼지기 마련이니까요. 처음에는 눈에 안 띌지 몰라도 경기를 거듭할수록 그런 선수가 눈에 띄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선수는 그런 선수입니다.”은퇴 후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그는 지도자로 변신한 후에도 기본에 충실한 선수를 키울 생각이다. 그는 2002 월드컵 때 그랬듯이 이번 대회가 ‘생애 마지막 월드컵’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축구 국가대표 골키퍼 이운재 선수는 올 초 ‘이기려면 기다려라’라는 자전 에세이집을 냈다. 2002 한일월드컵 8강전 스페인과의 승부차기서 호아킨의 킥을 막아 한국의 4강 신화를 일구어 낸 이운재 선수의 축구 인생이야기이다. 이운재 선수는 이 책에서 한국의 대표 ‘거미손’으로 평가받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옛날 같으면 은퇴할 나이지만 요즘은 조금 더 활동할 수 있거든요. 현역으로 있는 지금 이 모습에 안주하지 말고 올해 독일월드컵을 잘하자는 제 나름의 채찍인 셈입니다.”그는 에세이 출간의 배경을 그렇게 설명했다. 지금도 함성이 생생한 2002년 월드컵을 돌아보며 그는 그 명성에 흠이 되지 않게 2006 독일월드컵을 치르고 있다. 가난한 형편에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시작한 축구선수 생활. 혹독한 훈련을 못 이겨 가출했던 청소년 시절, 폐결핵에 걸려 잊혀진 선수가 됐다가 기적적으로 재기한 뒤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역사의 현장에 서기까지….

2002년 한·일월드컵 첫 경기 폴란드전에 골키퍼로 선발 출전하면서 떨렸던 기분을 시작으로 이전과 이후 오랜 선수생활을 통해 다져온 생각들을 정리했다. 2002년 당시 미국전을 끝낸 후부터는 전 선수가 탈진해 매 경기 후 피로 회복용 링거를 맞았던 이야기 등 풍부한 월드컵 뒷이야기를 담았다. 1994년 미국월드컵 후 자만에 빠져 술로 시간을 보내다 살이 너무 쪘고 이후 무리한 체중 감량을 하다 오히려 폐결핵 3기로 선수 생활이 끝날 뻔한 일, 선배 김병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린 일은 인고의 시간을 느끼게 한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강한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장악했다.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은 자유방임형으로 선수를 대했지만 고독과 싸워야 했다.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은 히딩크 감독처럼 선수단을 장악하려 했지만 장악능력이 떨어졌다”고 평했다.

반면 딕 아드보카트 감독은 히딩크 감독이 다시 돌아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히딩크 감독과 여러모로 닮았다는 것. 그러나 아드보카트 감독은 경기장에서 늘 선수들을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다르다고 평했다. 그는 아드보카트 감독이 선수 장악력과 부드러움을 갖췄으며 여러 면에서 적절한 선을 그을 줄 아는 프로라고 덧붙였다. 그는 한·일월드컵 스페인전에서 상대 선수 호아킨의 마지막 승부차기를 막아낼 때의 심정을 잊지 않는다. 상대가 볼을 찰 때까지 움직이지 말자고 한 다짐이었다. “내가 먼저 움직일 줄 알았는데 안 움직이니까 호아킨이 당황해 주춤하는 사이 볼의 방향을 읽어냈다.” 위기와 인내의 긴 시간을 보내온 그는 승부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이기려면 기다려라.”

센추리클럽 가입 ‘영광’

한국 대표팀 주장 이운재(33)가 4년 전 주장인 홍명보(대표팀 코치)의 영광의 족적을 밟는다. 월드컵 1,000분 출전의 위업과 스위스와 의 경기로 인해 A매치 100경기 출전, ‘센추리클럽’에 가입하는 영광을 누렸다, 2002년 6월 14일 포르투갈과의 D조 예선 3차전. 이날 경기 시작 10분 만에 홍명보는 대망의 월드컵 출전 1,000분을 넘겼다. 그리고 한국팀은 사상 최초로 월드컵 16강에 오르는 기쁨을 맛봤다. 지난 24일 오전 4시(한국시간) 스위스와의 독일 월드컵 G조 예선 3차전에서 이운재는 홍명보의 뒤를 이었다.1994년 미국 월드컵 독일전 후반 45분에 처음 얼굴을 내민 이후 지난 19일 프랑스전까지 월드컵 10경기에 출전, 912분간 그라운드를 누빈 이운재다. 스위스 전에서 90분을 소화해 1,002분을 출전, 한국 선수 중 홍명보에 이어 두 번째로 1,000분 출전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이날 또 다른 기록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A매치 100경기에 출전, ‘센추리 클럽’에 가입하게 되었다.한국 선수로는 차범근(121경기).홍명보(135경기). 황선홍(103경기). 유상철(122경기) .김태영(101경기)에 이어 여섯 번째가 되며, 골키퍼로는 처음이다.이운재는 19일 프랑스전에서 눈부신 선방으로 팀을 패배 위기에서 구했다. 2002년 이후 최고의 기량으로 태극전사들의 안정된 플레이를 이끌고 있다. 2002년의 영광을 등에 업고 이번 독일 월드컵에서도 ‘거미손’ 이운재의 활약은 변함이 없다.

# 이운재 결혼기념일에 눈물 ‘펑펑’2002년 유산한 아내에게 ‘빚갚는다’

수문장으로서 이운재는 이미 월드컵 경기 최다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94월드컵때 조별리그 독일전에서 교체투입돼 월드컵 본선에 데뷔했고, 2002월드컵때는 7경기 전부를 풀타임 소화하며 4강신화의 수호신이 됐다. 월드컵 본선 8경기에서 12시간 11분을 소화하며 6골을 내줬다. 그러나 월드컵은 그에게 환희만 전해준 것은 아니다. 축구인생에서 기쁨도 좌절도 월드컵이 만들곤 했다.대표팀 부동의 수문장 이운재는 토고전이 열렸던 프랑크푸르트에서 결혼기념일을 보냈다. 토고전 직후 “8번째 결혼기념일인데 함께 보내지 못한 아내(김현주씨·33)가 가장 보고 싶다”던 주장 이운재는 말한다. “아내는 저의 힘입니다. 매일 두세 차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 받습니다. 결혼기념일도 제때 챙겨주지 못하는 20점짜리 남편이 ‘어떤 선물을 받고 싶냐’고 물었더니 아내란 사람, 딱 두 가지라고 합니다. ‘16강 진출’, 그리고 ‘다치지 않고 몸 건강히 돌아오는 것’.

이운재는 사랑스러운 아내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이번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도 그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월드컵까지가 아니라 전 그냥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뿐이에요. 만약 어린 선수들이 더 잘 한다면 저는 물러나야겠죠. 전 스스로에게 냉정해요.”라고 이운재는 말한다.그는 은퇴한 후 골키퍼 전문지도자의 길을 걷겠다고 했다. “감독해서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부인의 충고도 있고, 몸으로 골키퍼를 체험한 자신의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나눠주겠다는 거다. 감독이 바뀌면 지도자 라인이 죄다 바뀌는 현실과는 달리, 골키퍼 전담 지도자로 우직하게 입지를 굳히고 싶다는 것이다. 진지하게 축구인의 미래를 얘기하는 그에게 “딸이 크면 축구시킬 거냐”고 물었더니 단호하게 “안 시킨다”고 말을 자른다.

“아들이 하겠다고 해도 안시켜요. 제가 고생했기 때문에 별로 시키고 싶지 않아요. 정 하겠다면 말릴 순 없겠지만 아이는 그냥 건강하고 해맑게 컸으면 좋겠어요.”라고 얘기했다.가려진 이야기지만 2002년 이운재에게 영광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 해 그는 월드컵 후 아내의 유산 소식을 들었다. 지금은 2003년 10월 큰 딸 윤서, 2005년 11월 둘째 딸 은서를 얻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아빠’가 됐지만 월드컵은 그에게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전해줬다. 하지만 이번 독일월드컵만은 이운재 그리고 그의 가족들에게 환희만이 가득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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