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잘 내뱉은 말 한마디가 천냥이라는 큰 빚도 탕감 받게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속담이다. 반대로 얘기하면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오히려 빚을 질 수도 있다는 의미. 최근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문화계 두 인물이 화제다. 유홍준(56) 문화재청장과 방송인 조영남이 그들. 두 사람은 평소 문화계에서 ‘입담’ 좋기로 소문난 인물들이다. 유홍준 청장은 학자시절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르면서 이미 화려한 수사(修辭)를 자랑한 바 있고, 방송인 조영남은 미술·문학·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솔직한 입담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뭐든 지나치면 부족한 것 만 못한 법. 이들의 거침없는 화법은 오히려 번번이 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유홍준

신상명세
▲ 1949년 서울 출생. 평창출신인 최영희(50)씨와 슬하에 2남을 두고 있다.
▲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를 나왔으며,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 석사과정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예술철학 전공)을 거쳤다.
▲ ‘공간’과 ‘계간 미술’에서 기자생활을 했던 그는 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된 이후 미술평론가로 활동, 영남대학교 조형대학 및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교수, 영남대학교 박물관장,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 문화재 전문위원,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 저서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3’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정직한 관객’ ‘조선시대 화론연구’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상)’ ‘화인열전 상,하’ 등이 있다.유홍준 청장이 세간의 이목을 모은 것은 지난 1993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발간하면서부터다. 전 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이 200만부 이상 판매되면서 유 청장은 일약 화제의 인물이 됐다. 이 책은 당시 국민적인 문화유산 답사 열풍을 일으켰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책 속에 실린 유적지에 관광 인파가 몰리면서 오히려 문화유산을 망가뜨린다는 원성이 생겨났던 것. ‘유명세에 비해 학문적 업적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1997년 영남대 박물관 관장을 지냈던 유 청장은 2003년 국립중앙박물관장 자리에 유력한 후보자로 지목되면서 한 차례 큰 홍역을 치르게 된다. 유 청장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운동권 출신으로, 일찍부터 현 정권과 가장 ‘코드’가 맞는 문화계 인사로 물망에 올랐기 때문에 ‘낙하산 인사’라는 비난이 더욱 거셌던 것이다. 그는 유인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등 여당 인사와의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계에서는 그의 자질론을 거론하며 사실상 국립중앙박물관 근무경력이 없는 유 청장의 선임에 대해 거센 반대 움직임을 보였고, 유 청장은 결국 공모 신청을 철회하기에 이른다.

국립중앙박물관장 자리를 놓고 불거진 ‘박물관 파동’ 끝에 낙마했던 유 청장은 지난해 9월 1일 문화재청장에 임명돼 문화재 정책을 총괄하는 수장에 오르며 다시금 문화계의 주목을 받는다. 베스트셀러의 저자로도 명성 높은 스타급 문화재 전문가의 영입은 문화계 안팎의 관심이었다. 하지만 ‘폭탄발언’과도 같은 잦은 ‘말실수’는 그를 ‘관심인물’로 만드는데 더 큰 역할(?)을 했다. 과거 그가 한 신문에 쓴 ‘백고불여일블(백 번의 고고가 한 번의 블루스만 못하다)’이란 말과 ‘세마도(洗馬圖)’를 두고 ‘애마부인도’라고 표현한 것, 추사의 글씨를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 등으로 표현한 말은 이미 한 차례 구설에 올랐던 유명한 일화다. 지난 3월 31일에는 전북대 박물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박물관 앞 히말라야 삼나무에 대해 “박정희 정권 때 심은 것으로 박물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가 나무가 잘려나가는 일을 자초했다.

30년 넘게 한 대학 박물관의 상징목이 돼 왔던 히말라야 시다(개잎갈나무)가 유 청장의 말 한마디에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져야 했다. 유 청장의 첫 구설은 지난해 10월 노무현 대통령에게 창덕궁을 안내하며 “대통령은 정조와 같은 개혁가”라고 말한 것에서 시작됐다. 12월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는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복원한 미륵사터 동탑을 두고 “(하도 복원이 잘못돼서)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키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는 직설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또 지난 1월에는 “박 대통령이 쓴 광화문 현판을 정조의 글씨로 바꾸겠다”고 말해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후 윤봉길 의사 사당인 충의사에 걸렸던 박 전 대통령의 현판이 훼손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 달 초 강원도 낙산사를 전소시킨 산불 때도 ‘입’이 문제였다. 그는 “피해액 30억원을 국비로 전액 지원해 신속한 복구가 이뤄지도록 하겠다”고 밝혔지만, 관련법은 문화재 보수 때 국보 등 국가지정문화재는 국가에서 70%, 지방자치단체에서 30%를 부담하도록 돼 있는 상황. 말이 앞선 것이다. 유 청장의 일련의 발언들이 ‘풍파(?)’를 일으키자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비롯한 인터넷 게시판에는 네티즌들의 비난의 글들이 쇄도하고 있다. 숱한 구설에 시달렸고 언론 보도에도 민감한 유 청장이지만, 그는 “나 하나 망가져서 문화재청의 존재를 알릴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닌가”라고 대범하게 받아넘기고 있다.한 네티즌의 말이 인상적이다. “유명세에 걸 맞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진정한 실력을 갖춘 분이 되길 바란다.”

조영남

신상명세
▲ 194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사대부고·대광고 입학시험 실패 뒤 강문고 입학. 한양대 음대에 거쳐 서울대 음대에 재입학했다. 이후 트리니티 신학대학교 졸업.
▲ 미8군 전속가수 활동 중 ‘딜라일라’ ‘보리밭’ 등으로 대중가수 활동 시작. 1971년 군 입대뒤 독자적인 미술수업을 거쳐 1973년 서울 인사동 한국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오늘날까지 작품활동을 겸하고 있다.
▲ 앨범으로 ‘제비’ ‘보리밭’ ‘불 꺼진 창’ ‘딜라일라’ ‘화개장터’ 등이 있으며, 1990년 카네기 홀 개인콘서트를 가졌다.
▲ 저서로는 ‘한국청년이 본 예수’ ‘조영남 양심학’ ‘놀멘놀멘’ ‘예수의 샅바를 잡다’ ‘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 등이 있으며, 현재 신문 잡지 등에 많은 칼럼을 쓰고 있다. 조영남(60)은 1969년 번안곡 ‘딜라일라’로 공식 데뷔한 지 올해로 가수생활 36주년을 맞았다. 성악을 전공한 인물답게 풍성한 가창력을 바탕으로 ‘도시여 안녕’, ‘화개장터’ 등 히트곡을 낸 가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가수로서뿐 아니라 KBS ‘체험 삶의 현장’, KBS 위성방송 ‘조영남이 만난 사람’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커다란 뿔테 안경의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이미지의 방송인으로서도 유명하다. 또한 화가이자 설치미술가로도 활동 영역을 넓혔으며 신문 칼럼을 연재하고 ‘조영남 길에서 미술을 만나다’와 같은 대중미술서를 펴낸 작가로도 이름을 올리는 등 가히 ‘전천후’로 활약하고 있다.

가수와 화가의 합성어인 ‘화수’란 용어를 만들어 낸 그는 음악, 미술, 방송, 글 등 4개 분야에서 모두 활약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이 내 혼에서 나오는 것을 표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스스로를 “일급 광대”라고 표현한다. 조영남은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났다. 6·25전쟁이 터지자 그의 가족은 월남해 충남 삽교읍에 둥지를 틀었다. ‘내 고향 충청도’나 ‘삽다리를 아시나요’ 같은 히트곡들은 이 제2의 고향을 소재 삼은 것들이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아버지(조승초 씨)가 덜컥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자, 어머니(김정신 권사-호칭에서도 알 수 있듯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는 갖은 고생을 하며 3남2녀를 키웠다. 그의 고교 시절은 가난했던 것만 빼면 화려 그 자체였다. 밴드부 멤버, 교지 창간 멤버, 미술반 반장, 동신교회 성가대 반장. 두 살 아래인 장래의 인기가수 이장희, 윤형주와 친분을 튼 것도 이때다.

1962년, 한양대 주최 ‘전국고등학교 음악 콩쿠르’에서 일등을 해 한양대 음대 특차 입학생이 됐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고, 곧바로 서울대 성악과에 도전했다. 1964년 서울대 음대에 입학한 그는 주위의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대중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66년 학비를 벌기 위해 무교동 ‘쎄시봉’에서 노래를 부르다 ‘통기타문화’의 대표주자인 송창식, 김세환 등을 만났다. 첫 결혼 상대가 된 탤런트 윤여정도 ‘쎄시봉’ 멤버였다. 이들 두 사람은 5년여 동안 단순히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내다 조영남이 제대하고 얼마 후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미국에서 성가 가수로 자리잡은 조영남은 내친 김에 미국 트리니티 바이블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한다. 이후 한국으로 건너와 가수로, 화가로, 작가로, 영화배우로, 방송MC로 종횡무진 활약하게 된다.

그 와중에 백은실이라는 새 사랑을 만나 윤여정과 이혼했고, 윤여정과의 사이에서 난 두 아들은 엄마 손에 맡겨졌다. 현재 그는 두 번 째 부인과도 이혼한 뒤 입양한 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과 음악에 비슷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9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도 꾸준히 개인전을 열고 ‘화가’로서의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정된 틀을 거부하고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해 온 자유주의자로 통한다. 그런 자유스러움은 그의 인맥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치, 문화, 예술 등 장르를 뛰어넘을 정도. 가요계 대선배이다 보니 대중음악계 사람들과의 인맥은 말할 것도 없다. 작가 최인호, 음악가 문호근, 지금은 뮤지컬 연출가로 이름이 높은 김민기, 명 MC로 불리는 이상벽, 음악평론가 이백천, 정치가 김홍신·김한길, 작가 최인호 등이 그와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작가 이윤기와는 “형님, 아우”하는 사이.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쏟아내어 자유분방하고 시원시원한 조영남의 성격은 그의 저서에서도 그대로 읽힌다. 속어나 비어도 속시원하게 내뱉으며 말하듯이 쓴 글은 그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느낌이다. 소설가 이윤기의 지적대로 ‘구어체 글쓰기의 고단자’라고 말했을 정도. 하지만 조영남 특유의 거침없는 말투와 반어법, 독설은 결국 그의 발목을 붙잡는 결정타가 됐다. 최근 ‘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이라는 제목의 책 출판과 관련, 일본 산케이신문과 한 회견 내용이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것.조영남은 일본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등과 관련해 “냉정히 대처하는 일본이 한 수 위”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면서 비난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조영남은 “국제적인 여론을 들끓게 해 이득을 취하는 일본의 술책이 한 수 위라는 의미로 일본 측을 기분 나쁘게 할 의도였는데 산케이신문이 앞뒤를 자르고 보도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는 네티즌들의 비난 글이 이어지고 있다.독도와 역사 교과서 문제로 점점 반일 감정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조영남의 발언은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번 일로 그는 10년 넘게 진행해왔던 KBS ‘체험 삶의 현장’ 프로그램 MC직을 반납해야 했지만 당분간 파문은 쉬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많은 연예 관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영남의 직설적이면서도 반어적인 화법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60평생을 그렇게 ‘할 말 하면서’ 자유롭게 살아온 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러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괜히 도마 위에 오를 필요는 없지 않을까”라는 한 연예인의 말은 은근히 공감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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