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는 부산교도소 1급 모범수 이씨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사건 발생 30여년 만에 경기 화성연쇄살인사건 유력 용의자를 수사 중이라고 18일 밝혔다. 사진은 7차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수배전단의 모습. 2019.09.18. (출처=블로그 캡처)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사건 발생 30여년 만에 경기 화성연쇄살인사건 유력 용의자를 수사 중이라고 18일 밝혔다. 사진은 7차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수배전단의 모습. 2019.09.18. (출처=블로그 캡처)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화성 연쇄 살인사건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벌어진 살인 사건 중에서도 ‘최악’이라는 평을 받던 장기 미제 사건이다. 범인은1986년 9월 15일부터 1991년 4월 3일까지 경기도 화성시 태안과 정남, 팔탄, 동탄 등 태안읍사무소 반경 3㎞ 내 4개 읍·면에서 13세부터 71세 여성 10명을 연쇄적으로 살해하며 전 국민을 공포와 충격에 빠트렸다. 특히 화성 연쇄 살인사건은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엽기적인 반인륜적 범죄였다.

시민들 “공소시효 만료돼 처벌은 어려워” 분노
“5·7·9차 사건 3건과 DNA 일치”

범인은 피해자의 스타킹이나 양말 등 옷가지를 이용해 목을 졸라 살해하는 교살(絞殺)을 살인 수법으로 가장 많이(7건) 사용했다. 손 등 신체부위로 목을 눌러 사망케 하는 액살(縊殺)도 2건 있었다. 범인은 또 피해자가 사망한 뒤 신체 주요부위를 훼손하는 극악무도한 짓도 4건이나 저질렀다. 당시 경찰 수사에 따르면 범인은 버스정류장에서 연결된 논밭길 혹은 오솔길에 숨어 있다가 귀가하는 피해자들을 노려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의 수사망을 비웃듯 화성을 중심으로 반복되던 살인은 1991년 4월 3일 동탄면 반송리에서 벌어진 사건을 끝으로 멈췄다.
성폭행 피해를 가까스로 면한 여성과 버스 운전사들의 진술에 따르면 범인은 20대 중반의 165~170㎝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남성이었다. 용의자의 정액과 혈흔, 모발 등을 통해 확인한 혈액형은 B형이었다. 경찰은 범인 검거를 위해 205만 여 명에 달하는 연인원을 투입했다. 용의선상에 오른 수사 대상자만 2만1280명, 지문 대조 대상자는 4만116명으로 단일 사건 가운데 최다였다. 그럼에도 범인은 연기처럼 자취를 감췄고, 결국 사건은 장기 미제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은 이후 1996년 연극 ‘날 보러 와요’와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 등으로 만들어졌다. 드라마 ‘시그널’과 ‘터널’에서도 다뤄졌다. 특히 ‘살인의 추억’ 봉준호 감독은 2013년 개봉 10주년 행사에서 “범인이 이 행사에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DNA 분석 기술 발전으로 드러난 윤곽

첫 사건 후 33년, 마지막 사건으로부터 28년이 지난 2019년 대한민국에서 화성 연쇄 살인사건은 서서히 잊히고 있었다. 그 누구도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흔적조차 찾을 수 없던 범인을 잡게 될 것이라고는 쉽사리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올해 주요 미제 사건 수사 체제를 구축하고 관계 기록 검토와 증거물을 분석하던 경찰은 지난 7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화성 연쇄 살인사건 6차 사건 피해자 옷에서 채취한 DNA 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 증거물에서 채취한 DNA와 일치하는 인물이 있다는 국과수의 통보를 받게 됐다. 경찰은 잔여 증거물 감정을 추가로 의뢰하고 수사기록 정밀 분석 등을 통해 특정한 용의자와 사건의 관련성을 파악 중이다. 공소 시효는 지난 2006년 4월 2일 끝나 처벌이 불가능하지만 용의자가 진범으로 확인될 경우 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했다는 의미가 있다. 이와 관련해 경찰은 19일 가진 브리핑에서 “오랜 시간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심심한 애도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공소시효 만료 이후에도 화성 사건과 관련해 다양한 제보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진실 규명을 위해 당시 수사기록과 증거물을 보관해 왔다”며 “화성 피해자 옷에서 채취한 DNA 3건과 용의자 DNA가 일치했다”고 설명했다. 또 “DNA 분석 기술 발달로 사건 발생 당시에는 DNA가 검출되지 않았지만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도 재 감정에서 DNA가 검출된 사례가 있다는 점에 착안해 지난 7월 15일 현장 증거물 일부를 국과수에 DNA감정 의뢰했다”면서 “대표적 미제 사건들은 공소시효가 만료됐더라도 최선을 다해 수사 하겠다”고 덧붙였다.
경찰 등에 따르면 특정한 용의자는 화성 연쇄 살인사건과 유사한 범행으로 경기지역이 아닌 부산 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춘재(56)씨로 알려졌다. 이 씨는 27세던 지난 1994년 1월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인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5년째 수감 생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씨는 아내와 싸운 뒤 앙심을 품은 상태에서 집에 온 처제를 성폭행하고 신고당할 것이 두려워 망치로 살해했다. 이후 시신을 1㎞가량 떨어진 철물점 창고로 옮겨 유기한 혐의로 기소됐다. 1, 2심 재판부는 “반인륜적 범죄로 죄질이 극히 불량하고, 범행이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이뤄진 점, 범행에 대한 뉘우침이 없는 점 등을 들어 도덕적으로 용서할 수 없다”며 이 씨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우발 범행일 가능성을 감안해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했다. 이 씨는 파기환송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가 처제를 살해한 수법은 화성 연쇄 살인사건과 닮은 점이 많다. 이 씨는 처제의 시신을 청바지 등으로 묶어 싸놨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 현장에서 피해자의 옷가지가 발견된 것과 유사하다. 시신 유기 방식도 비슷했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 당시에도 이 씨는 피해자의 시신을 범행 현장 인근의 농수로나 축대, 야산 등에 숨기는 대담함을 보인 바 있다.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무기수 이춘재 혐의 부인
DNA 틀릴 확률 거의 없어

1995년 부산 교도소에 수감된 이 씨는 20년 넘는 수감 생활 동안 단 한 차례의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 1급 모범수로 전해졌다. 19일 부산일보에 따르면 이 씨는 교도소 생활 중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징벌이나 조사를 받은 적이 한 차례도 없었다. 이로 인해 부산 교도소는 이 씨를 4등급으로 나뉘는 수감자 등급 중 1급 모범수로 분류했다. 무기 징역수가 아니었다면 이미 가석방 됐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다만 이 씨는 현재 불거진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진범이라는 혐의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19일 경찰에 따르면 이 씨는 최근 이뤄진 경찰의 1차 조사에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부산 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 씨를 찾아가 조사했지만 별다른 답변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이 씨의 혈액형이 당초 알려진 범인과 같은 B형이 아닌 O형이라는 점은 ‘이 씨가 진범이 아닐 수 있다’거나 ‘공범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의 근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경찰은 “당시 확보한 혈흔이 용의자의 것인지, 피해자의 것인지 불분명하고 당시 경찰이 왜 B형을 특정했는지 알 수 없어 증거 효력이 떨어진다”며 “이씨가 진범이 아니라거나, 공범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경찰의 주장이 사실이더라도 수사 초기 혈액형을 B형으로 특정함에 따라 진범을 놓쳤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씨가 혐의를 인정하더라도 추가적일 처벌은 어려울 전망이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이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 전에 일어난 범죄이기 때문이다. 현행법은 공소시효 폐지 전 일어난 범죄에 대해서는 소급 적용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수많은 피해자를 낸 화성 연쇄 살인사건. 30여 년간 감춰져 있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지만 정의를 바로 세우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