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교류는 국가와 민족의 원대한 미래 위한 통치권 행사’ 피력 노 대통령 탈당 전해듣고는 ‘그래, 어쩔수 없는 일이지’ 반응미국의 <비지니스 위크>가 선정한 아시아의 50인 스타중 한명으로 뽑히기도

-재판이 마무리 단계에 와있는 시점에 대북협상 실무자 처벌에 대한 언급은 여러 가지 미묘한 문제를 불러 일으킬 만한데요.
▲ “김대중 전대통령은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남북교류는 국가와 민족의 원대한 미래를 위해 통치권을 행사한 대표적 사례의 하나인데… 라며 다음 말씀을 잇지 못하시더군요.”이는 어느 의미에서 노대통령이 대북사업 관련 특검을 받으면서 일이 잘못 꼬여갔다는 유감의 뜻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전청장에 따르면 “김 전대통령은 우리가 북을 지원함으로써 북이 강경자세에서 유연하게 나오게 되었으며, 남의 자본주의 시스템, 자유민주주의 체제도 이해하게 됐다며 그것만 가지고도 큰 성과였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까.
▲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습니다. 다만 미국이 강경하게 나오는 것이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이 유연하게 나오면 한반도 문제는 경직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북미 관계에서 미국의 책임이 더 강조된다는 발언으로 이해될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 민주당과 신당에서 김대중 전대통령을 대북 특사로 파견해야 한다는 의견이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김 전대통령이 미국의 책임을 더 강조한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평가된다.

-북한과 관련된 다른 발언은 없었습니까.
▲ “남북화해와 협력의 결과물로 해로가 열리고, 철도와 도로 등 육로, 항공로가 열리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미국이 유연하게 나온다면 훨씬 더 남북, 북미간에 좋은 결실이 있지 않겠나 하는 의견을 피력하셨습니다.”이 전청장이 김 전대통령을 방문한 날은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을 탈당한 바로 그날이었다.

-노대통령 탈당 건에 대한 발언은 없었습니까.
▲ “노대통령께서 오전에 탈당을 했다고 말씀을 드리니까 두 눈을 감고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시다가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어떤 의미로 해석되는지가 궁금했다. 이에 대한 견해에 대해 그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고 했다. 대신 “김 전대통령이 민주당 쪽에 심정적으로 가까이 가있지 않았겠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한편 김 전대통령은 이 전청장의 재임중 업적에 대해서도 평가했다.“YS 정권때만 해도 매년 13만3,800발의 최루탄을 쏘았지만 국민의 정부 들어서서 단 한발의 최루탄을 쏘지 않았다는 사실, 쇠파이프와 각목이 난무하는 격렬한 시위 현장에 여자경찰이 폴리스 라인을 만들어 시위 자체를 무력화시켰던 점을 예로 들어 저에게 노고가 많았다고 격려해주셨습니다. 특히 2000년 12월 28일 경기도 일산에서 1만2,000명의 노동자가 집결해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을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을 때 헬리콥터를 이용한 ‘돌풍작전’으로 단 한사람의 부상자도 없이 해산했던 점을 높이 평가해주셨습니다.”이 전청장은 정계진출을 모색하며, 고향인 전북 전주시 완산구를 부지런히 찾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과 신당 쪽에서 테크노크라트 영입케이스로 이 전청장에게 의사를 타진해오고 있어 양 진영에 아직 확실한 답을 내놓고 있지는 않다. 다만 지역 정서와 정치적 지향점 측면에서 민주당에 더 호의를 갖고 있다. 전주 완산이라면 신당의 중견인 장영달 의원의 지역구다.“지난 대선때 호남인은 지역화합과 국민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호남사람들은 상실감과 박탈감 허탈감을 갖고 있습니다. 멀쩡한 당을 부수고 신당을 꾸민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똘똘 뭉쳐도 부족할 판에 분열의 행태를 보이니까 나오는 안타까움으로 봅니다.”

-흔히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같이 보수적 멘탈리티에 지역당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사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지역구도를 깨기 위해 신당을 만든다는 것인데요.
▲ “그렇다면 더 신당 할 이유가 없죠. 리모델링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일부 386 등 젊은 세대가 50년 동안 전 한국정치를 단칼에 쳐낼 수는 없습니다. 중국을 보십시오. 후진타오나 우방궈 등 권력 핵심부가 대부분 60대 초반입니다. 이들은 20년전 40대 초반으로서 중국의 꿈이었습니다. 중국은 시간을 가지고 노·장·청이 조화를 이루어서 새로운 중국을 건설해가고 있습니다. (코드 맞는 사람들이)민주화투쟁시의 동력으로는 훌륭했지만 지금은 순리대로, 시간을 재가면서 더불어 개혁을 추진해나가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이 전청장 역시 재임시절 ‘개혁 청장’이라는 말을 들었다.

흔히 거론되는 386 세대의 개혁성향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저는 일선 파출소장에서부터 경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국민생활의 가장 밑바닥부터 훑어왔다고 보아야죠.”이씨가 경찰청장으로서 맨먼저 수행한 업무는 `국민과 함께 하는 봉사경찰, 시민의 편에 서는 질서경찰`을 위한 개혁이었다. 이는 1978년 일본 경찰대 유학시절 신봉해온 현대경찰의 아버지 영국의 로버트 필경(런던경찰청장) 영향이 컸다. 로버트 필경은 그에게 민주경찰상을 제시해준 인물. 이씨가 경찰청장으로 부임하던 때는 1999년 11월 인천 인현동 호프집에서 화재사고가 발생한 직후. 이 화재사고는 경찰의 조직폭력배 비호, 유흥업소로부터의 정기적 상납, 개인정보 누출 등 경찰부패상이 단적으로 드러난 상징적 사건이기도 했다.

그래서 경찰을 비난하는 국민적 질타가 들끓었고, 이로 인해 경찰개혁을 단행할 절호의 기회도 얻은 셈이었다. 이 전청장은 곧바로 500여개의 경찰개혁 과제를 단행했다. ‘국민의 힘’을 빌려 비민주적 관행과 제도를 뜯어고치고, 무엇보다 수십년 동안 경찰의 한으로 내려온 격무와 박봉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실적으로 말한다면 무최루탄을 끝까지 지켰다는 점입니다. 제 경찰청장 재임시 단 한발의 최루탄도 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격렬한 시위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경찰개혁 내용 중 대표적인 것은 여경의 대폭 기용이다. 15만 경찰 중 1.8%의 여경 비중을 배 이상인 4.0%로 끌어올렸다. 이로 인해 `따뜻한 경찰상`을 구현하는 데 한몫 했다.

특히 깡패를 추적하다 깡패로부터 역습을 받아 순직한 경찰관의 젊은 미망인을 여경으로 특채하는 등 경찰 사기를 위한 복지대책도 과감히 수립했다. 이같은 공적으로 그가 나중 `’수지 김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경찰관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변호인 선임 모금운동이 벌어져 6,000만원의 성금이 모아지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비지니스 위크>가 선정한 아시아의 50인 스타중 한명으로 뽑히기도 했다. 무죄 선고를 받은 뒤 그는 이 돈을 전액 퇴직경찰 모임인 경우회와 암환자를 돕는 기금으로 기탁했다고 한다.

-지금 정계 진출을 타진하고 계시죠?
▲ “흔히 우리나라 정치가 가장 낙후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투쟁의 정치시대가 끝났는데도 여전히 정치권은 구태의 정쟁 속에서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낡은 인물이 청산되지 않아서 나온 결과라고 보고, 제가 과감히 나서서 정치개혁의 선두에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21세기는 전문가 시대라고 합니다. 다양하고 다원화한 국민의 욕구를 이끌어낼 국제적 감각도 필요합니다. 그에 제가 적합한 인물이라고 자부하고 나서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한가지 덧붙인다면 낙후한 고향 전북의 발전을 위해 마지막 봉사를 해보겠다는 꿈이 있습니다.”

-전북 하면 새만금 사업, 부안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 건설 등 국책사업 관련 시위가 격렬한데 대책은 있습니까.
▲ “정치인들이 문제의식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포퓰리즘에 입각해 일을 처리한 결과,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정파적 이익이나 지역이기주의가 아니라 전북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방향에서 새만금과 부안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의 해결책이 있다고 봅니다. 현재 부안에는 경찰병력이 6~7천명 주둔해 있습니다. 이는 어떤 이유로건 납득할 수 없을 뿐더러 대화로 풀 수 있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새만금 역시 환경론자들이 반대하고 있는데, 지역주민이 누구보다 이의 문제점과 대안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제 생각을 말한다면 새만금은 농업만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로테르담과 같은 항구도시로 만들어 서해안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전주 완산입니까.
▲ “그곳은 제가 태어난 곳이고, 초중고교를 다녔으며, 철도공무원인 아버지의 수입만으로는 가계를 꾸려갈 수가 없어서 어머니가 품삯바느질을 하며 한복집을 경영하던 제 고향입니다. 고향만 생각하면 수구초심이라고, 언제나 돌아가서 몸을 누일 곳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특히 낙후된 제 고향을 돌아보면 마음이 착잡해지고, 그래서 어떤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지요. 고향 발전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맡겠다는 각오입니다. 지역과 나라를 위해 생활정치와 민생정치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보겠습니다.”이 전청장은 동국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경찰간부 19기로 경찰에 발을 들여놓은 후 전북청장 전남청장 경찰대학장 서울청장, 그리고 전북 출신으로는 최초로 경찰총수인 경찰청장(54대)을 지낸뒤 지난 2001년 말 옷을 벗었다. 그후 용인대와 전주대 객원교수로 초빙돼 강단에 서왔다. 부인과의 사이에 2남이 있다.

‘수지 김 사건’`이란?
전두환 정권때 안기부에 의한 납치조작사건1987년 전두환 정권 말기 안기부(현 국정원)에 의해 행해진 납치조작 사건이다. 당시 안기부가 정권 안보 차원에서 부부싸움 끝에 피살된 여성과 그 남편을 북의 첩보원들에 의해 납치되어가던 도중 극적으로 탈출한 시민으로 둔갑시킨 사건이다.홍콩에서 사업을 하던 수지 김의 남편 윤태식씨는 부부싸움 끝에 수지 김을 살해한다. 홍콩경찰이 수사망을 좁혀오자 윤씨는 북한으로 탈출하려고 북한 공관을 찾아간다. 북측이 이를 거부하면서 국내의 안기부 첩보망에 걸려든다. 국내에서는 정권타도 시위가 격렬해지고, 이때 안기부가 위기의식을 고조시키고자 윤 부부 사건을 북한공작원에게 납치되어가다 수지 김은 살해되고, 윤씨는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사건으로 조작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2000년 2월 당시 이 전청장은 경찰청을 방문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으로부터 ‘외사과에 협조할 사항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 전청장은 다른 용무로 출타 직전이어서 실무자와 협의하라고 안내하고, 급히 경찰청사를 나갔다. 그러나 나중 이 사건은 이 전청장이 수지 김 사건에 대한 경찰의 내사 중단을 주도한 혐의(직권남용 권리 행사 방해 등)로 기소되는 이유가 되어 2001년 12월 경찰청장 퇴임 1개월만에 구속된다. 그러나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구속 2개월만에 석방됐다.

2심에서 서울고법 형사5부는 “내사를 즉각 중단하고 안기부에 이첩하라고 지시했다는 관련자 진술을 믿기 어렵고 명확한 증거로 보기 힘들다”고 무죄 이유를 밝혔다.이 사건으로 검찰권의 남용이 문제가 되었다. 이 전청장은 경찰청장 재직시 경찰수사권 독립을 공론화에 붙였으며, 검찰은 이에 대한 압력으로 무리하게 이 전청장을 간첩조작 사건 은폐 연루자로 몰아간 것이란 여론이 일었다. 말하자면 모략과 정치적 음모로 악용된 사례였다는 것이다. 한편 지난 3월 이 전청장은 87년 당시 안기부장을 지낸 장세동씨를 사석에서 만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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