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내세우나 코드는 ‘친분’일 뿐 … 인재등용 스펙트럼 넓혀야집권당 갈라놓은 것은 대단한 잘못 … 분열해서 성공한 역사 없어노정객은 우리 정치가 잘못 되어가고 있으며, 그 중심에 노무현 대통령이 있다고 잘라 말했다. 부산 영도출신의 3선의원으로 그동안 공화당 사무총장, 3선개헌 반대투쟁의 조타수, 민주회복국민회의 실무책임자, 김대중 민추협공동의장의 비서실장을 지내고,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3년간의 옥살이를 하는 등 반민주·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서왔던 한국 현대정치사의 독특한 인물 예춘호(77)씨. 그는 지금 정계를 은퇴한 뒤 조용히 낚시와 서예로 노후를 보내고 있지만 노무현 정부가 외교, 내치, 남북문제를 비롯 노사, 송두율 문제 등 정치와 사회, 갈등치유 측면에서 지나치게 실험만 거듭하고 있다고 답답해했다.

특히 민주당을 깬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고향의 정치후배가 집권한데 대해 마음속으로 지지를 보내왔다면서도 민주당적을 버리고 대미외교에 혼선을 자초하는 등 국가위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비판했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69-9 프라임빌딩 602호 영도육영회. 예춘호씨가 10년 전에 차린 사무실이다. 낚시를 함께 하는 후배가 사무실도 없이 지내는 그에게 조그만 공간을 내주었던 것이 이곳의 유래가 됐다. 사무실은 텅 비어있다시피 했다. 50여평의 홀엔 미니 소파 한 세트와 테이블이 덩그마니 놓여 있을 뿐이다.우뚝 솟은 콧잔등에는 퍼렇게 멍이 든 흠집도 보인다.

“콧잔등이 깨진 것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을 살면서 생긴 것입니더. 80년 겨울, 형이 확정되고 청주교도소로 이감 도중 코가 동상에 걸린 것이지요. 코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추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치료가 시원치 않다 보니까 고름이 생기고 콧등이 헐더니 이렇게 흉터가 생깁디더. 그러나 지금은 많이 나은 편이지요.”부산 말씨지만 썩 그렇게 억센 사투리는 아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네시간여 동안 인터뷰가 진행되었지만 단 한차례도 자세를 흩뜨리거나 고쳐 앉는 법이 없었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몸가짐과 예절이 지나치게 절도가 있다 싶었다. 50대의 필자가 견디지 못하고 몸을 비비꼬는 경우는 있었어도 그는 육군사관학교 생도처럼 꼿꼿하게 앉아 노무현 정부를 진단하고 분석하고 질타했다.

-원로 정치인으로서 요즘 우리네 정치를 한번 살펴봐 주시지요. 노대통령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습니까.
△ “87년 양김(김영삼· 김대중) 후보단일화 때입니더. 당시 변호사로 있던 노무현씨가 내 서울 사무실을 찾아왔어요. 상당히 말을 잘한다는 생각을 하고, 그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는데 밖에서 백기완씨가 연설한다는 소리가 들려오니까 얘기하다 말고 그리로 달려가더군요. 예의가 없다고 보기보다 무엇에건 호기심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으로 보았지요. 나중에 보니 YS의 공천을 받아 부산에서 국회의원이 되더군.”

-노무현 정권에 대한 지금까지의 평가를 한다면.
△ “참여정부가 뭡니꺼. 다른 정부는 참여정부가 아니란 말입니꺼. 국민의 정부, 문민정부도 마찬가지요. 노무현정부, 김영삼정부, 김대중정부 하면 될 것을 별 수사를 다 동원해 뻐기려 든다니까. 그리고 코드란 게 뭡니꺼. 철학과 이념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있는 것을 코드가 같다고 하는 모양인데, 노대통령의 코드란 것이 바로 ‘친분’ 아닌가요. 어려운 시절 동지로 지냈던 사람들은 의사가 잘 소통될지 모르겠지만 통치는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더. 국가경영에는 인재등용의 스펙트럼이 넓어야지. 옹졸하고 편협해선 안된다 카이.”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들어가야 한단 말입니까.
△ “인품이 중요해요. 김두관(전 행자부장관)이나 최낙정(전 해양수산부 장관), 고영구 (국정원장), 송두율을 보세요. 말을 바꾸니 정권에 더 부담이 되고 있는 거 아이가. 정직과 진실이 권력의 가장 큰 에너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카이. 다음으로 능력을 말할 수 있는데 과연 이 정부에 그런 인물이 얼마나 있을까.”

-시각을 달리해서 본다면 이는 다수당이 정략적으로 대응한 결과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든 꼬투리 잡아 패대기쳐서 정치적 곤경에 빠뜨리려는…
△ “통치는 그런 것까지 감안해야지요. 밤낮없이 상대방 타령만 하는 것은 무책임합니더. 항간에선 야당이 너무한다는 말을 듣도록 유도한다는 말도 들리던데… 그러나 그런 기 모두 국력낭비지요.”

-노정권의 대북문제에 대해서도 불만을 갖고 계십니까.
△“물론입니더. 통일문제는 멀리 보아야 합니데이. 최소한 동서독의 통일교훈을 새겨야지. 조급하면 안되는 기라. 인도적으로 돕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더. 국내의 가공공장도 중국이나 동남아로 갈 것이 아니라 개성 해주 원산으로 가야 합니더. 다만 국민적 동의, 즉 국회의 의결을 거쳐서 가야 북도 떳떳하고 우리도 명분이 실리는 겁니더. 무엇이 조급해서 몰래몰래 해왔습니꺼. 별 것 준 것도 없으면서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지 않아요. 그리고 박지원이 대북 송금문제로 감옥에 가있는데 그 사람 책임이 뭐가 있습니꺼. 건방떨며 심부름 한 죄밖에 더 있어요? 대통령 중심제라면 책임질 사람은 분명히 한 사람 있지요.”김대중 전대통령을 빗댄 것이 분명해보인다. 민주화 동지이자 한때 그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대중 전대통령의 책임을 거론하는 것이다. “소련에 수교조건으로 30억불을 주었습니더. 거기에 비하면 북한에 6분의 1의 금액이 갔습니더. 타민족에게도 30억불을 주는데 동족인 북한에 100억불 주어서 나쁠 게 없지요. 다만 명분과 절차를 밟아 주었다면 이런 불필요한 국민적 소모전은 없었을 게지요.”

-대북 관련사업을 공개리에 했다면 야당이나 수구세력의 제동으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유를 대는 사람도 있는데요.
△“권위주의 정권, 독재정권이라고 하는 공화당 정권에서도 국민적 동의, 즉 국회 절차를 밟으려고 발버둥을 쳤어요. 그런 노력을 단 한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나요.”예씨는 우리의 건국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느냐를 살펴야 한다고 주문했다. 미국과 우익세력이 중심이 되어서 나라를 세운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사진2>“일제치하 민족독립운동을 한 사람들 중에는 북으로 간 사람들은 공적을 인정받았지만 남에 남은 인사들은 좌익으로 몰려 매도되거나 곤욕을 치른 역사를 갖고 있습니더. 그래서 나도 이런 허구의 역사를 고발하다 감옥에 갔다 온 적이 있어요. 우리나라는 보수적인 사람들에 의해 건국이 되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40년전 우리는 보릿고개라는 초근목피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이때 박정희가 등장해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더. 그리고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자본가와 국민이 총궐기해서 오늘날 이나마의 산업화를 이룬 것입니더. 이 점을 인정해야지 송두리째 거부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이라크 파병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빨리 매듭지어야지. 한승주 주미대사가 조건없이 파병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소. 자주국방도 지금 거론할 단계가 아니고. 용산 미군기지를 성남의 서울공항 쪽으로 이전한다는 보도가 나오자 ‘미군기지 안된다’ ‘여기에 핵기지 세우지 말라’등 요란한 플래카드가 송파구와 성남 일원을 도배질하다시피 했는데 그것도 정부가 개입 안하면 못할 기라요. 한국의 정보부는 40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미국의 CIA는 2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소. 좀더 차원 높은 외교가 필요해요. 미국에서 우리 물건 불매운동 벌어진다는 말을 듣고 걱정을 많이 했습니더.” 예씨는 2년전 만났을 때보다 의식이 많이 보수화 되어 있었다.

이 점을 지적하자 자신은 진보적이라는 답변이 금방 돌아왔다. 그러면서 한국은 미국의 한 다리(足)라고까지 표현했다.“국익적 측면에서 그렇다는 거지.노대통령이 미국 가서 부시를 만나고 나서 미국쪽으로 경사되었는데 그전까지는 자주외교를 거론했던 거 아이가. 그러면 그 과정을 밝혀야지, 모든 게 생략이 된 기라. 반면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 비위를 끝까지 거슬려 왔어. 그러나 혼선이란 것이 없었다는 거지. 미국이란 나라가 우리를 우습게 봅니더. 박정희가 쿠데타 성공하고 미국 가서 케네디 형제들 앞에서 얼마나 망신을 당했습니꺼. 책상 위에 구둣발 올려놓고 박정희를 대할 정도였대니까. 그런 나라를 우리가 지혜롭게 잘 대처해야지. 기분으로 하는 기 아닙니더. 자꾸 정책을 바꾸면 더 얕보이기 십상이지.”

-신당 문제는 어떻습니까.
△ “대단히 잘못되었지. 집권당을 갈라놓아서야 되겠십니꺼. 노대통령이 민주당 신세 진 것 별로 없다고 했는데 민주당의 절대적 지지로 대통령이 되었지. 그것을 무시하면 정직하지 못합니더. 내가 보기로 민주당을 깨고 시민사회단체, 일부 종교단체와 함께 신당을 만드는 모양인데, 성공 못할 겁니더.”

-왜 성공을 못한다고 보십니까.
△ “분열해서 성공한 역사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민주당이란 호남을 기반으로 한 정당인데 서울과 수도권은 적어도 호남 인구가 25% 안팎이 됩니더. 전라도의 의석은 36석 정도밖에 안되지만, 수면 밑으로는 거대한 수도권의 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이들을 무슨 명분으로 설득할 수 있습니꺼.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신당을 만든다고 하는데 분열의 수로 읽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이 있겠십니꺼. 깊은 뜻이 있다고 하지만 정치는 논리가 깊거나 복잡한 속성을 갖고 있지 않지요. 정치적 찬반은 간단명료합니다. 복잡한 이론이나 추론으로 찬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카이. 국민 대다수가 인내심을 갖고 친절하게 신당 논리에 접근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요.”

-신당은 민주당과 연합공천을 염두에 두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던데요.
△ “민주당에서 들어주겠습니꺼. 그러니까 노대통령이 계산없이 덤빈다고 봐야 하지.”-노대통령은 당적을 갖지 않겠다고 했는데요.
△ “그기 그렇게 되겠십니꺼. 빨리 당을 가져야지요. 당적을 안갖겠다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입니더.”그러면서 그는 “모든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겠지만 노대통령은 말을 아껴야 한다”고 주문했다.“말이 많으면 손해보는 일이 많습니더. 노자에 대상무형(大象無形)이란 말이 있습니다. 큰 코끼리는 형태가 없다는 것이지요. 다리를 만져도 벽같고, 배를 만져도 벽같다는 것이지. 그래도 자신이 뭐라고 얘기를 하지 않아요. 가장 좋은 임금은 말이 없는 임금이란 말도 있어요. 고기를 구울 때 자꾸 뒤적거리면 몸체가 바스러져요. 영도자의 레토릭은 상대방이 여러 해석을 낳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은 언어입니다.”그러면서 언론과도 불필요하게 충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일제때 친일한 부분도 있지만 저항한 부분도 있지요. 박정희에 저항한 동아일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더. 우리 언론이 독재정권에 저항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독재자에게 얹혀 이권에 개입한 측면이 있었십니더. 이처럼 양면성이 있는 것을 한쪽만 부각시켜서 따지면 정략적이란 말을 듣지예. 못마땅하더라도 마주쳐 이해를 촉구해야 합니더.”

-3김과는 누구보다 지근거리에서 정치를 같이 하셨는데 각자의 장단점을 얘기해줄 수 있겠습니까.
△ “나는 JP(김종필)를 통해 정치를 시작했는데 대단히 명석하고 낭만파지. 64년 한일수교 때 오히라나 오노 반보쿠 등 일본의 정객들이 30대의 JP를 보고 보기드문 인재라고 평가했소. 그가 집권했다면 국민을 위해 좋은 일 많이 했을 기라. 그러나 박정희의 견제를 너무 많이, 너무 오래 받았어. DJ가 탄압을 받았다고 하지만 JP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오. 그의 사생활은 아예 없었으니까. 김형욱· 이후락 정보부장이 계속 감시를 하고, 공화당 내에서도 엄청난 견제를 했으니까. 박정희의 조카사위라고 하지만 권력의 속성이란 비정한 거요. 박정희는 JP를 모퉁이의 주춧돌로 있어야 하는데 덤빈다고 꾸중을 했지. 스타의식에 젖어 적만 양산한다는 거야. 그 말은 맞는 것같소. 10·26 이후에도 권력을 쥘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하지만 하나회 등 박정희가 키운 군부세력 때문에 쥘 수가 없었지. 반면에 DJ는 박정희가 왜 그를 미워했는지 모를 정도요. DJ는 모가 난 사람이 아닌 기라. YS가 더 건방지고 저돌적이었지.”그는 몸이 불편해서 부인 황치애(71)씨와 단둘이 사는 용인 죽전의 동아솔레시티 아파트 자택에서 거의 칩거하다시피 하고 있다. 서예로 마음을 비워가며 친한 사람이 오면 한줄 옛 선현의 글귀를 써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다. 여야 정치인들과는 거의 소통이 없다. 그는 물러날 때를 아는 사람만이 행복의 실체를 안다고도 했다. 3남1녀 중 딸은 출가했고 세 아들 모두 한양대, 국민대, 고려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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