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로명 편

공로명 전 장관 [뉴시스]
공로명 전 장관 [뉴시스]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외무부가 이승만 대통령의 캐비넷, 관방 비서실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었죠”
“당시 외무부는 인원을 채워가는 단계 였어요”

- 외무부 초기라 일하실 여건이 마땅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당시 외무부 인원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 제가 입부한 1958년 당시에 우리 외무부의 규모는 TO(인원 편성표)상으로 본부 인원이 89명, 재외공관 인원이 186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재외공간의 TO는 여유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186명 전부를 재외공관에 내보내지 않았죠. 재외공관이라고 해봐야 13곳이 돼요. 제가 외무부에 들어갈 때는 12곳이었는데, 들어가서 그해 제네바에 대표부가 생깁니다. 그래서 13곳이 되었죠. 그러니까 외교 공관 13곳, 총영사관이 6곳이었죠. 한 공관에 미국하고 일본 제외하고 거의 3~4명 규모니까 186명이라고 하는 TO는 다 쓰지 못하고, 남는 재외공관의 TO를 본부에서 썼습니다.
그래서 본부 인원이 그때 한 120명쯤 되었어요. 보면 과에 과장과 서기관이 있고, 그다음에 3급사무관이 있는데, 일종의 수석 사무관이에요. 3등 서기관이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도 있고. 3등서기관 밑에 갓 사무관으로 진급한 외교관 시보가 있죠. 이렇게 해서 1955년 기준으로 봤을 때는 총 인원이 225명인데, 1958년에는 275명으로 늘었어요. 당시 외무부는 국방부 출신 장교들도 모집하고, 대학에서 들어오는 사람들도 받아들여서 인원을 채워가는 단계였습니다.
저는 처음에 방교국 정보과에 배속됐는데, 이원경 국장이 계셨을 때죠. 1958년 말인가, 1959년쯤에 여권과에 사고가 나요. 그때는 여권이 대단히 귀중한 물건이었어요. 해외여행이 심히 통제될 때니까 공무여행을 빼놓고는 일반인들의 여권은 문화여권이라고, 문화회의에 간다든가 할 때만 발급 가능한 아주 제한된 것이었죠. 여권 발급을 받으려면 청와대, 당시 경무대의 승인을 받아야 했어요. 그렇게 어려우니까 사고가 났죠. 그래서 여권과를 확 뒤집어서 사람들을 교체했습니다. 그렇게 의전국장으로 이원경 방교국장이 가시면서 데리고 있던 사람들을 여권과에 투입했죠. 그래서 저도 정보과에 있다가 여권과에 가게 됐습니다.
전 문화담당이었는데, 제가 하는 일은 여권 신청이 들어오면 내부에서 심사하고 ‘내주는 게 좋겠다’는 건의서를 경무대에 제출하는 것이었어요. 서식은 “To: Office of the President. From: Ministry of Foreign Affairs”라 쓰고, “발급해도 좋겠습니까?”를 물은 후, 위에서 “좋다”는 허가가 내려오면 발급해주었죠. 엄격하게 통제된 겁니다. 주로 외환관계 때문이었는데, 그렇게 해서 여권이 있어야, 한국은행에서 외환을 아주 제한된 금액이긴 해도, 환전을 해줬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외무부가 이승만 대통령의 캐비넷, 관방 비서실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이야기해도 그렇게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외무부가 쓰던 예산은 정부 전체 예산의 0.3~0.4% 정도 규모였어요. 그러고 영국에서 연수를 하고 있었는데, 김유택 대사가 떠나시면서 박동진 참사관을 샤제로 임명했죠.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임시대사대리입니다. 그러다가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서 이승만 정부 때에 중용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보복 인사랄까, 숙청적인 의미가 있는 인사를 한 가운데 박동진 장관에게 본국으로 들어오라는 발령이 났어요. 그래서 본인이 하고 있던 샤제의 책임을 다음 차석인 송광정 1등서기관에서 넘기기 위해 외무성에 대사대리를 변경한다는 통보를 했어요. 그랬더니 영국 외무성에서 “대사대리가 대사대리를 임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랬죠. 그래서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본국에서 직접 영국 외무성에 대사대리 변경에 관한 전보를 쳐줘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송광정씨가 대사대리가 됐어요. 외교 업무의 본산인 영국 외무성에서 귀중한 배움을 얻었죠.
그리고 영국에서 훈련 끝내고 본국에 돌아와서 국제기구과에 배속을 받는데, 이범석 과장이 적십자사 청소년부장으로 있으면서 1957~1958년 제네바 북송 교섭을 했죠. 김용식 당시 주불공사가 국제적십자사와 교섭을 했어요. 이때 김용식 공사, 최규하 당시 주일대표부 참사관, 이범석 적십자 청소년 부장, 세 분이 대표로 가서 국제적십자사와 교섭을 했어요. 일본의 재일동포 북송을 저지하기 위한 교섭이었죠.
그런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김용식 장관이 외무부차관 되신 후에 이범석씨를 외무부로 끌어왔고, 바로 국제기구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국제기구과는 지금 외무부의 직제와는 달리 UN과 국제기구, 모든 국제기구를 다 관장하고 있었어요. 요새같이 경제관계 국제기구 따로, UN 따로가 아니라 전부를 통괄한 거죠.
그런데 돌아와서 보니, 5·16이 있고 나서 군인들이 정권을 장악했으니까 군인식 행정을 진행하고 있던 겁니다. 그러니까 “무슨 외무부에 이렇게 비밀이 많으냐. 몇십 년 된 전보 문서들을 왜 가지고 있느냐. 정리해라”고 해서, 그때 총무처가 정한 새로운 규정에 따라 문서를 정리하려고 했죠. 목표일이 정해져 있었고 매일 앉아서 파일을 꺼내서 취사선택을 하며 정리했습니다. 하루는 내던진 문서서류를 다시 들여다보니까 우리가 국제노동기구인가? 어느 국제기구에 가입할 때의 문서가 파기문서 속에 들어있는 겁니다. ‘가만(可晩)’이라는 대통령의 사인이 들어 있는 문서였죠. 그때 유실된 문서 서류가 적지 않을 겁니다.

- 말씀하신 맥락에서 조금 벗어나긴 합니다만, 경무대 시절 경무대에서 외교 업무를 많은 부분 관장하고 감독했다고 한다면, 군사정부 그리고 이후 제3공화국으로 넘어오면서 그러한 역할 변화가 크게 있었습니까?

▲ 5·16 이후에는 군사정부의 주체세력에서 감독관 네 사람이 파견됐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서독대사를 하게 되는 최덕신, 또 한 사람은 한병기 대사인데, 박정희 대통령의 사위죠. 첫 따님의 남편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관도 했죠. 그다음에 한기라고 하는 사람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은 곧 정상화 돼요. 그런데 5·16 이후에 외무부가 커다란 폭풍을 맞았죠. 병역을 필(畢)하지 않은 사람들이 꽤 있었거든요. 특히 고시 출신들이 그랬죠. 고시 합격할 정도면 갈 기회가 있었건 없었건 군대에 가지 않고 쭉 학창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죠. 그때 많은 사람이 군대에 갔다가 복귀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최광수 전 장관 같은 분도 그때 사병으로 군대를 갔죠. 대충 1~2년 단기 복무를 하고 나서 돌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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