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서찰을 읽은 정세운의 눈가에는 굵은 이슬이 맺혔다. 노 정승의 우국충절과 해박한 병법 지식에 목이 울컥 메어 오고 흐렸던 정신이 맑아졌다. 정세운은 만복에게 기개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시중 어르신께 내가 서찰을 잘 받았다고 전해주게나. 나는 어르신의 우국충정이 실현될 수 있도록 종사에 이 한 목숨 바칠 생각이네. 자네는 청주로 돌아가서 어르신께 개경탈환이라는 대사를 성취한 후 다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게.”
“예, 장군님.”
한편, 청주에서 부친 이제현과 모친 부부인 박씨와 눈물의 작별을 한 혜비는 연로한 부친과 말을 나눌 수도, 서로 먼발치에서 쳐다볼 수도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참기 힘들었다. 그녀는 늙은 부친 걱정에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로 옷소매를 적셨다.
‘아버님, 제발 무사하세요. 부처님의 자비가 아버님을 보살펴드릴 것입니다. 아아, 아버님이 이번 몽진 길의 고비를 넘길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건강하신 어른이라 하더라도 천리 길을 걸어오시지 않았던가……. 다시 개경에서 뵐 수 있어야 할 터인데…….’

12월 15일. 
공민왕은 개경을 떠난 지 26일 만에 피난처인 복주 근처에 도착했다. 복주 일대는 불안한 기운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왕이 피난 온다’는 소식이 어느새 왕의 일행보다 더 빠르게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복주 지방은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웠다. 농사는 근래에 보기 드문 풍작이었다. 창고는 곡식과 땔감으로 가득 찼다. 이곳은 전쟁터와 떨어져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평화로웠다. 
복주 백성들은 충절로 임금을 공궤(供饋, 음식을 드림)하고 가축 등을 바치러 왔다. 실의에 빠져있던 공민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백성들이 여전히 그에게 충성심을 갖고 있다는 좋은 징표였다.   
이에 공민왕은 다시금 용기를 얻어 각오를 새로이 하고 복주의 지방관서에 머무르며 행재소(行在所)를 차렸다. 행재소 주위는 군사들이 철통같이 지켰다. 군문을 만들어 무단출입의 소요와 간도(奸徒)의 잠입을 봉쇄하였다. 행재소의 출입은 조정의 중신들이라도 ‘표신(標信, 신분증)’이 없으면 허락되지 않았다. 


개경탈환을 위한 반격작전

12월 18일 새벽. 
공민왕은 뼛속까지 시린 찬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제단 앞에 서기 위함이었다. 공민왕은 열성조의 위패를 모시고 홍건적들이 고려 강토를 핏빛으로 물들인 일 등을 상세히 고했다.

‘존귀하신 조상님들이여, 이 국토가 적들에 의해 무참하게 유린된 것은 저의 불충탓입니다. 우리 고려는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저희의 강토를 되찾아 종묘와 사직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힘을 내려 주소서.’

공민왕이 제문을 다 읽자 저만치 청량산 축융봉(祝融封) 너머로 동이 터왔다. 이윽고 조정회의가 열렸다. 먼저 상장군 이원명은 개경수복의 방략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전하, 개경을 탈환하기 위한 본격적인 반격작전을 세우시고 홍건적을 물리칠 총사령관을 임명해야 하옵니다.” 
문하시중 홍언박은 전란에 임하는 왕의 자세를 강조했다.
“전하, 피난생활 중에는 전하부터 절제된 생활을 보이셔야 하옵니다. 어찬(魚饌)을 줄이시고 임금과 백성이 함께 싸워 오랑캐를 물리치겠다는 뜻을 세우소서.”
몽진에 지친 신하들은 머뭇거리기만 하고 구체적인 방책을 내지 못했다. 그러자 이제현의 서찰을 받은 정세운이 무장답게 우렁차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빨리 애통교서를 내리시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해야 하옵니다. 그리고 파발을 보내 여러 도의 군사를 독려하여 적을 토벌하게 하시옵소서.”
공민왕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백성들에게 애통교서를 내리고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

“군왕인 과인이 안일에 빠져 군사의 일을 폐하고 강구하지 않은 까닭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쪽에 옮겨 오게 되었다.”

이어 공민왕은 정세운을 총병관에 임명하고 지휘권을 일임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개경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개경수복을 위해 정세운 장군을 총병관(총사령관)으로 명한다.”
공민왕은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아 애통교서와 절월(節鉞, 생살권을 상징하는 수기와 도끼)을 내렸다. 이는 이제현과 공민왕이 이심전심 생각이 같은 결과였다. 
정세운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볼모로 있을 때 시종한 장군으로 김용과 함께 공민왕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장사성의 토벌군으로 원나라에 파병되어 전투를 지휘한 경험이 풍부했다. 또한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빈한 장군으로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정세운은 놀라운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다. 의병을 모집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군사를 모았다. 특히 흩어져 있던 서경의 군사 1만 명을 개경 부근으로 불러 모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도합 20만 명의 대병력이 규합되어 홍건적에 대한 반격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고려 말 혼란기에 ‘20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해가 바뀐 1362년(공민왕11) 1월 17일. 
정세운은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나성인 보정문 밖 3리에 소재) 앞에 둔을 쳤다. 군영에 모든 장수들이 모이자 마침내 정세운은 홍건적을 정벌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춘 뒤 군략회의를 열었다. 장군들이 그 앞에 나아가서 군례로 인사를 하자, 정세운은 단상에 올라 엄숙하게 말했다.

우리들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오랑캐를 물리치고자 각고정려(刻苦精勵, 몹시 애를 쓰고 정성을 들임)하며 준비를 해왔던 바, 이제 모든 조건이 성숙하여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성전(大聖戰)을 일으키게 되었다. 때마침 엄동설한에 눈비가 섞여 내려 적들은 향수에 젖어 방심하고 있다. 이것은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다는 증거이다.

적들의 정예부대들은 모두 동쪽 외성문인 숭인문에 포진하고 있다. 적들은 고려군이 자신들의 정예부대가 포진한 동문을 공격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적들의 허를 찔러 최영, 이성계 장군이 대담하게 동문을 먼저 공격하고, 안우, 이방실, 김득배, 한방신, 이여경 장군은 나머지 개경성을 물샐틈없이 포위하도록 하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위기에 몰릴수록 사나워지기 마련이니 궁지에 몰린 도적을 끝까지 쫓지는 말고, 적들의 퇴로를 열어주고 파상 공격하라.       
이번 싸움의 승패에 고려의 흥망이 달려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오로지 제장(諸將)들의 분투 여하에 달려 있다.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니, 위대한 승리를 거두어 임금의 성은에 보답하는 영광을 누리도록 하자.

군령을 받은 제장들은 숙연한 자세로 기립하여 장수된 자로 나라와 운명을 함께할 것을 맹세했다. 
이튿날인 1월 18일 새벽. 삼경이 지날 무렵이었다. 
고려군 장졸들은 모두 입에 재갈을 물고 말은 목의 방울을 떼고 소리 없이 개경 나성 성곽 가까이 접근했다. 드디어 포위, 매복, 포진이 완료되었을 때 정세운은 명령했다.
“기습전을 서두르라!”  
홍건적들이 잠이 들기를 기다려 고려군은 숭인문을 돌파하여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쇄도해 들어갔다. 그때까지 홍건적은 아무런 대비도 없었다. 설마 한밤중에 전면 기습을 감행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냐!”
“불이야 불! 고려군이 기습했다!” 
“다들 일어나서 싸워라!”
꿈속을 헤매다가 소스라쳐 일어난 병사들은 미처 갑옷을 챙겨 입을 겨를도, 병장기를 잡을 겨를도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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