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전총리의 보폭이 커지고 있다. 지방선거 직후 더욱 그렇다. 마치 선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더라도 고 전총리의 행보는 예의 ‘신중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급해도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려는 조심스런 몸짓이다. 지난 23일 여전도회관 그의 사무실에서 이뤄진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도 고 전총리만의 스타일이 그대로 묻어났다.

갑자기 빨라진 그의 보폭도 그의 입장에선 ‘정상적인 사회활동’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다. 다만, 총리직 퇴임 이후 차기 대통령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수위로 나타난 결과를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는 것. 최근 들어 대외활동에 나서는 이유도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자신은 고위공직을 맡아 국민과 국가에 봉사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시 유력 대권주자 중 한 사람이다. 할 말이 없을 리 없다. 그에게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신념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방선거 전까지 가급적 말을 아껴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부쩍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일반 국민들도 고 전총리의 행보에 관심이 많다. 예측 가능한 로드맵이 있는가.
▲총리직 퇴임 이후 1년 6개월 동안 국내 언론인터뷰 및 대학의 강연 요청도 사양해 왔다. 단지, 하버드 대학 등 해외 대학의 강연 요청에만 응했을 뿐이다. 작년 연말부터 대학 강의를 시작으로 언론인터뷰에 응하고 있지만, 이는 정상적인 사회활동일 뿐이다. 또 강연이나 언론인터뷰 등에 응하는 이유는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서다. 정치적인 일정은 아직 생각해본 적 없다. 국민의 소리를 듣고 내가 이 시대에 담당해야할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으며, 그 구상을 가다듬고 있다. 적절한 시기에 구체적인 구상을 밝힐 생각이다.

-늘어난 발걸음이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민심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을 보고 나도 충격을 받았지만, 특별히 지방선거와 관련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국민으로부터 과분하리만큼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것이 항상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게 사실이다. 시대적 소명을 국민 속에서 찾고 다듬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해 달라.

-대외활동을 통해 확인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 국민의 절박한 현실이다. 서민들은 하루 빨리 경제사정이 나아져 허리를 펴고 살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 또 젊은이는 미래의 꿈을 설계할 일자리를, 경제인들은 정부의 정책을 믿고 걱정없이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지방선거에 참여할 것이라는 항간의 예측이 빗나갔는데.
▲ 정치권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참여 요구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지방자치에 중앙 정치권력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당 참패’라는 지방선거 결과와 맞물려 향후 정부여당의 국정운영에 상당한 차질을 빚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어떻게 보는가.
▲ 중앙 정치권력이 중심이 돼 치른 지방선거는 정부와 여당에 대한 심판의 장으로 결말났다. 또 우려했던 대로 지방자치가 실종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다. 한 정당이 지방의 행정권력과 의회를 싹쓸이하는 지방자치 권력의 독점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결국, 권력에 대한 적절한 견제와 균형이 무너진 구도가 됐다. 정부와 대통령의 리더십에도 큰 타격을 준 셈이다.

-참여정부 초대 총리로서, 또 ‘행정의 달인’으로서 국정운영의 난맥을 바로잡을 비책(秘策)이 있다면.
▲ 참여정부는 지금부터라도 무오류의 독선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민과 동고동락하는 낮은 자세로 소통하고, 코드가 다른 의견과 가치관을 포용해야 한다. 국민으로부터 국정운영을 수임 받은 입장에서 부족한 전문지식을 보강하고, 시행착오로 인해 책임질 것은 책임을 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7월중 국민운동 성격의 모임인 ‘희망국민연대’를 결성할 계획과 관련, 가급적 비정치인을 주축으로 하겠다고 했는데 이유는 무엇인가.
▲ 정치권이 중심이 되거나 개입될 때는 자칫 정파적 이해득실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희망국민연대는 한국의 미래발전전략과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을 구상하고 모색하기 위한 시민운동성격의 모임이다. 그래서 비정치인·전문가들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정치적 결사체로서의 가능성은 열어 두지 않았는가.
▲ 신당의 모태라는 확대해석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 한국의 정치는 소모적인 이념논쟁이나 당리당략을 떠나 실사구시에 따라 민생경제를 회생시킬 때다. 국민의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모으는 새 정치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그랬을 때 나라가 바로 선다고 믿고 있다.

-희망국민연대의 모태가 될만한 과거의 유사 사례가 있는가.
▲ 글쎄…. 비정치인, 그리고 중도실용주의 개혁을 지향하는 국민이 중심이 돼 현실정치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치를 모색하는 전혀 새로운 시도다.

-‘안정감’은 총리의 장점으로 꼽힌다. 반면 자기 ‘색깔’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 이념 좌표를 말할 때 나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두 가지 가치가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그 하나이며 나머지는 사회안전망 구축을 강화하는 것이다. 앞의 것을 보수라 한다면 나는 개혁적 보수다. 또 뒤의 것을 진보라 한다면 나는 합리적 진보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직후부터 ‘차기 대통령감’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총리께선 국민이 바라는 역할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 산업화와 민주화, 그 다음 과제는 선진화다. 앞으로 10년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그 성패의 관건은 국민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는 지도자의 리더십과 정치력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동안 중도실용주의 개혁세력의 연대·통합을 주창해 왔다. 이는 정당과 정파를 초월, 국가적 차원의 창조적 실용주의에 대한 생각과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폭넓게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지도자들과 제 정파, 그리고 정당정치 세력들이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국가적 과제인 민생경제의 회복과 나라의 미래발전전략을 함께 모색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볼 생각이다.

-‘중도실용주의 개혁세력의 연대·통합’을 말하고 있다. 그것으로 한국정치의 최대 걸림돌인 ‘지역주의’가 극복될 것으로 보는가.

▲ 한국정치가 민주 대 반민주라는 극단적인 대립구도로 대치하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중도’는 곧 ‘기회주의’로 치부돼 설자리가 없었다. 극단의 선택만이 선명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립의 시대는 이제 지났다. 이념과 정파, 지역으로 나뉘어 갈등과 대립, 반목을 되풀이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할 때다.

-빈부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다. 이를 해소할 복안은 있는가.
▲ 첫째는 성장이다. 외국의 성공사례에서도 찾을 수 있듯이 경제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은 저소득층의 소득을 증가시킨다. 그러나 이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충분조건은 사회안전망 구축이다. 직업능력 향상 등의 ‘교육’, 실업수당 등을 통한 ‘고용’의 안정, 그리고 ‘복지’가 삼각을 이루는 형태다.

-재벌기업들은 출자총액제 폐지 내지 완화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이에 관한 견해는.
▲ 출자총액제의 기본 취지는 대기업 집단의 문어발식 경영을 위한 순환출자를 억제하기 위함이다. 때문에 이를 폐지하려면 순환출자를 억제하는 ‘대안’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기업의 투자는 활발해져야 한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의 구속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 안타깝다. 그러나 비자금 및 불법상속 문제에 대한 법적인 원칙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렇다하더라도 현대자동차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이다.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더욱 발전해 나가기를 바란다.

-기억에 남은 부친(고 고형곤 박사)의 가르침이나 가훈을 소개한다면.
▲ 서양철학을 전공한 선친은 후에 불교철학에도 심취, 서양과 불교철학의 다리를 놓는 연구에 전념했다. 사실, 내 삶은 선친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어린 나에게 선친은 ‘사람은 도량이 커야 한다’고 했다. 후에 공직에 나서면서는 두 가지 가르침을 주셨다. 하나는 ‘줄서지 말라’는 것이다. 내 좌우명이 지성감민(至誠感民:정성을 다하면 국민이 감동한다)인 이유다. 또 하나는 ‘돈 받지 말라’는 것인데, 이는 공직자로서의 생존법칙과 다름없다.

-지난 한국 대 토고전과 프랑스전은 어디서 누구와 관전했나.
▲ 서울시장 재직 시절 건설했던 상암 월드컵경기장도 둘러볼 겸해서 그곳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려 열심히 응원했다.

-젊은 날을 되돌아 볼 때 작금의 월드컵 ‘거리응원’ 현상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는가.
▲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의 응원문화로 정착되고 있는 최근의 ‘광장응원’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광장이 커뮤니케이션의 통로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국민적 단합과 에너지를 애국심으로 분출시킴으로써 대한민국의 역동적인 힘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다만 건전한 스포츠정신을 나누고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장으로 더욱 성숙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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