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는 정신적으로도 나약하고, 좋은 팀 동료가 아니다. 올해도 부진해 텍사스에서 퇴출된다면 다른 팀에서도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2005년 2월)“나를 ‘바보’라고 불러라. 박찬호는 텍사스에 도움을 줄 것이다.”(2005년 3월)“박찬호는 확실히 달라졌다.”(2005년 4월)이 모든 말이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활자화되어서 신문 지상과 인터넷에 퍼졌던 말이다. 주인공은 ‘박찬호 저격수’로 이름을 떨쳤던 텍사스의 지역 신문 ‘달라스 모닝 뉴스’의 에반 그랜트 기자. 지난 스프링캠프 때 앞장서서 박찬호의 ‘조기 퇴출’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불과 2개월만에 박찬호에 대한 평가가 180도 달라졌다.

남자라면 한 입으로 내뱉기 낯간지러운 말들이다. 하지만 ‘박찬호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저격수조차 스스로를 ‘바보’라고 표현하며 ‘항복’을 선언한 셈이었다.리안 특급’ 박찬호(32·텍사스)가 다시 ‘희망’을 던지고 있다. 한국이 외환위기로 신음하던 90년대 말 혜성처럼 등장해 메이저리그의 강타자들을 무릎꿇리며 국민들의 ‘속풀이’를 실현시켰던 박찬호가 시련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4월 한달간 거둔 성적이 3승1패. 지난 2002년 텍사스 이적후 거듭된 부진으로 한국의 CF계에서도 퇴출됐던 박찬호의 인기는 시청률에서 증명됐다. 메이저리그를 위성생중계하고 있는 ‘Xports’ 채널이 박찬호 등판 경기로 최근 케이블 채널 가운데 시청률 1위를 차지한 것.

지난 3년간 ‘먹튀’ 오명을 뒤집어 쓰고 신음했던 ‘코리안 특급’의 부활에 야구팬들의 시선은 다시 박찬호의 어깨로 쏠리고 있다.얼마만이냐 4월 3승지난 4월 박찬호는 LA 에인절스(14일) 뉴욕 양키스(24일) 보스턴 레드삭스(30일)를 상대로 승리를 따냈다. 이들은 지난해 나란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강팀들이다.박찬호가 4월 한달간 3승을 거둔 것은 LA 다저스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냈던 2001년. 당시 박찬호는 15승11패를 거둔뒤 5년간 6,500만달러의 천문학적인 돈을 받고 텍사스로 이적하는 ‘FA대박’을 터뜨렸다. 똑같이 4월 3승을 챙겼던 2000년엔 18승10패로 시즌을 마감, 메이저리그 최고의 성적을 남긴 바 있다.과거의 통계로 살펴본 산술적인 계산으로 박찬호는 올시즌 최소 15승을 거둘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물론 부상 등의 돌발변수가 있게 마련이지만 현재 분위기론 가능한 얘기다.강속구의 추억은 버렸다. 대신 경험으로 승부한다.

이제 박찬호에게서 시속 95마일 이상의 강속구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파워피처로서의 전성기였던 다저스시절처럼 홈플레이트 부근에서 솟아오르는 ‘라이징 패스트볼’도 사라졌다. 칠테면 쳐보란 듯 가운데로 강속구를 꽂아넣으며 타자를 윽박지르는 피칭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지만 그래도 박찬호에겐 경험과 노련함이 있었다.지난 94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96년부터 주전으로 뛴 박찬호는 올해 풀타임 10년째를 맞는다. 공의 위력이 줄어들었는데도 여전히 삼진을 많이 잡아내고, 안타를 맞지 않는 것은 절묘한 볼 배합 때문이다. 슬로커브와 투심 패스트볼, 체인지업, 그리고 빠른 직구를 섞어 타자들을 혼동시키고 있다.

이젠 마운드에서 타자들의 수를 읽고 있다는 얘기다.이전만해도 강속구에 비해 컨트롤이 불안했던 박찬호는 ‘제구력 난조’의 대명사였다. 던지는 투수조차 종잡을 수 없는 엉뚱한 컨트롤 때문에 미국 언론들은 박찬호의 피칭에 대해 ‘효과적인 제구력 난조’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을 정도였다.하지만 올시즌 박찬호는 공을 던지고 싶은 곳으로 던진다. 여전히 볼넷은 많지만 예전처럼 가운데 공을 던지지 못해 어이없이 내주는 볼넷과는 성격이 다르다. 구석구석으로 유인구를 던졌으나 타자가 말려들지 않아 기록되는 볼넷이다. 도망가는 피칭을 하다 내주는 볼넷과는 다른 의미여서 야구 관계자들은 ‘내용이 좋은 볼넷’으로 평가하고 있다.투심 패스트볼 덕에 땅볼 투수 변신올시즌 박찬호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단어가 투심 패스트볼과 ‘땅볼 투수’다.

지난 겨울부터 연마해 박찬호가 본격적으로 선보인 게 투심 패스트볼이다.일반적인 직구는 손가락에 공의 실밥 4줄이 걸리는 그립을 사용한다. 반면 투심 패스트볼은 두 가닥의 실밥에 검지와 중지를 나란히 올려놓고 던지는 구질이다. 포심 패스트볼은 회전력이 강해 볼 스피드가 나는 반면 투심 패스트볼은 스피드는 줄어들지만 타자 앞에서 변화가 심한 것이 특징이다.특히 홈플레이트 부근에서 싱커처럼 가라앉기 때문에 타자들의 방망이에 맞으면 플라이볼 대신 땅볼이 만들어진다. 이런 변신은 박찬호에게 안정된 피칭을 선사했다. 텍사스의 홈구장인 알링턴의 아메리퀘스트필드는 플라이볼 투수에겐 치명적인 구장이다. 경기장에 흐르는 제트기류는 웬만한 뜬 공도 담장 너머로 실어가기 때문에 그동안 박찬호에게 불리했던 게 사실. 하지만 땅볼 투수가 된 박찬호는 장타 허용이 눈에 띄게 낮아졌으며 위기때마다 내야 땅볼 유도가 가능해져 대량실점도 줄었다.

특히 투심 패스트볼은 왼손 타자의 몸쪽으로 심한 변화를 일으키면서 들어가기 때문에 박찬호에겐 ‘천적’이었던 왼손 타자들을 요리하는 데 위력을 떨치고 있다.땅볼 투수의 변신은 데이터로도 증명됐다. 박찬호는 올시즌 초반 6경기에서 땅볼 아웃 39개를 잡아낸 반면 플라이볼 아웃은 26개를 기록해 플라이볼 대 땅볼비율이 1.58이었다. 이는 박찬호의 역대 최고치다.선발투수라면 적은 힘으로 타자를 잡을 수 있는 땅볼 투수가 유리하다. 홈런을 맞을 위험성이 줄고, 병살을 유도할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 온다.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박찬호의 무기는 투심 패스트볼인 셈이다.풀타임 10년, 이제 100승을 노린다.<사진2>지난 96년 4월7일은 한국 야구사에 남을 역사적인 날이다.

미국 시카고의 리글리필드에서 한국인투수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첫 승을 거둔 날이기 때문이다. 당시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있던 박찬호는 에이스였던 라몬 마르티네스가 허벅지 근육통으로 쓰러지자 급히 마운드에 올랐다. 불 같은 강속구를 뿌리며 4이닝 동안 삼진 7개를 잡으며 3안타 무실점으로 시카고 커브스 타선을 막아 첫 승을 신고했다.이후로 꼭 10년.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개인 통산 100승에 도전한다. 지난 4월 한달간 3승을 추가한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통산 성적은 97승73패. 3승만 추가하면 100승 투수 대열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말이 쉽지 10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의 역사속에서도 100승 투수는 흔치 않았다. 그동안 540명이 100승 고지를 밟았을 뿐이다. 현역으로 뛰고 있는 선수들 가운데 100승 투수는 300승 클럽에 가입한 로저 클레멘스(휴스턴) 그렉 매덕스(시카고 커브스) 등을 포함해 고작 38명.10년간 100승이면 1년에 10승씩 거두면 가능한 수치지만 만만한 게 아니다.

메이저리그의 강타선을 상대로 두자릿수 승수를 거두는 게 일단 쉽지 않은 일. 게다가 10년 동안 부상을 피해야 하고, 꾸준히 선발 투수로 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이 모든 것을 이겨내야 비로소 주어지는 100승 고지를 박찬호가 조만간 밟게 된다. 물론 시기는 더 빨랐을 수도 있었다. 2001년까지 다저스에서 거둔 승수가 통산 80승. 당시만 해도 박찬호는 2년 내에 100승 고지를 무난히 밟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텍사스로 이적한 뒤 허리 부상이 고개를 들었고, 투구 밸런스가 무너지며 박찬호는 끝없는 부진의 길로 빠져들었다.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3시즌 동안 텍사스에서 거둔 승수는 고작 14승. 전성기때라면 한시즌에도 가능했던 승수를 3년에 걸쳐 기록했을 정도로 부진했다.

때문에 아시아출신 최초 100승 투수의 영광은 다저스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탬파베이)에게 넘겨줘야 했다. 노모는 지난 2003년 100승째를 기록했다. 부상만 아니었다면 박찬호의 페이스가 더 빨랐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다.박찬호는 현재 로테이션대로라면 5월 한달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11일), 시카고 화이트삭스(17일, 29일) 휴스턴 애스트로스(24일)전 등 4경기를 남겨 놓고 있다. 4경기 가운데 3경기에서 승리하면 대망의 100승 고지를 밟을 수 있는 셈. 최근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돌풍을 일으키며 아메리칸리그 승률 1위를 달리고 있는 점이 다소 부담스럽지만 박찬호로선 4월의 상승세를 잊지 않는다면 충분히 격파할 수 있다.부활한 박찬호가 한국인 투수로는 처음으로 빅리그 100승 고지를 밟는 장면은 야구팬이라면 절대 놓쳐서는 안될 하이라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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