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개 켜는 ‘천·신·정’ 삼각 노림수

지방선거 참패 이후 잠잠했던 열린우리당이 술렁이고 있다. 2007년 대선 승리를 위한 새판짜기 움직임이다. 가장 먼저 시동을 건 쪽은 당권을 장악하고 있는 김근태 의장. 오픈 프라이머리(완전 국민참여경선제) 공론화 시도와 함께 범여권 ‘헤쳐모여’ 깃발을 들어 올렸다. 김 의장과 더불어 우리당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구 당권파, 이른 바 ‘천ㆍ신ㆍ정(천정배 신기남 정동영)’ 그룹도 이에 가세할 태세다. 지방선거 이후 독일로 단기 유학을 떠났던 정동영 전의장은 10월1일 귀국할 예정이며, 천정배 전장관과 신기남 전의장 역시 각자의 목소리를 키우며 새판짜기 대열에 합류할 시기를 타진하고 있다. 주목할 대목은 천신정 그룹의 심상치 않은 화음. 아직까지 ‘정권재창출’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이들의 방향키는 미묘한 지점에서 엇갈리고 있다.


천신정 분열의 전주곡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사실, 이들의 분열 가능성은 이미 1년여 전부터 여권을 중심으로 점쳐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선친의 친일행적으로 의장직에서 낙마한 신 전의장, 이어 법무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된 천 전장관의 정치적 동선이 그것이다.

‘천’ 호남 나들이에 ‘정’ 귀국 앞당겨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야 천신정 분열 가능성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는 것일까. 당시만 해도 정 전의장은 통일부 수장으로서 ‘대권 수업’을 받고 있었다. 당으로 복귀했을 때 천 전장관은 정 전장관의 전철을 밟고 있었다. 예견됐던 지방선거 결과, 정 전의장은 7월 독일로 단기 유학을 떠났고 이후 천 전장관이 당에 복귀하는 수순을 밟았다. 이처럼 여당이 정치적 몸살을 겪고 있었던 지난 1년여간 이들에게 공존할 시간적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던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천 전장관의 당 복귀가 당내 역학구도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당내 최대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천신정 그룹의 핵심인사, 또 전직 법무부 장관으로서 위상도 강화된 상태다. 게다가 정 전의장과 달리 선거와 관련 어떠한 ‘책임’에서도 자유롭다는 무결점은 당내 ‘역할론’을 불러 일으켰다.
천신정 분열의 전주곡이 흘러나오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그동안 제 3후보로 거론돼 왔던 천 전장관이 ‘독자 세력화’에 나서고 있는 것. 정 전의장의 귀국과 관련, 천 전장관의 행보와도 무관치 않다는 시각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법무부 장관 퇴임 후 정중동 행보를 보이던 천 전장관은 요즘 들어 부쩍 호남 나들이가 잦다. 당내 의원들과도 접촉면을 넓히고 있다는 것 역시 주목할 대목이다. 전북 전주를 중심으로 세를 형성하고 있는 정 전의장, 그리고 목포 출신인 천 전장관의 동선은 ‘호남 맹주’를 연상케 하는 구도다.
천 전장관이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정계개편의 주도세력도 짚어볼 대목이다. ‘민생화합개혁세력’은 김 의장 주변의 ‘민주개혁세력 연대론’보다 외연이 확대된 개념이다.

‘신’ 캐스팅 보트 역할론
이와 관련, 비밀리에 천 전장관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동북아전략연구원’의 요즘 동태도 심상치 않다. 정치권 주변에선 천 전장관이 차기주자로서 제시할 ‘미래 비전’에 대한 연구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역대 대선을 준비하는 주자들이 그랬듯이 천 전장관 역시 ‘출판 기념회’를 통해 대선 행보를 시작할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김 의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선에서, 정 전의장과 천 전장관의 경쟁 구도로 발전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신진보연대’를 이끌고 있는 신기남 전의장이 최근 주장하고 나선 ‘대선 후보 조기 선출론’도 천 전장관의 광폭 행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도 등장한 터다.
신 전의장의 주장은 “정체성 있는 대선후보를 조기에 선출, 그에게 전권을 위임해 안으로 당을 결속시키고 밖으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 국민의 신뢰를 얻게 하자”는 것이다. 대선 후보 조기 선출론엔 정당의 고유한 정강·정책 약화의 우려가 있는 오픈 프라이머리와 ‘헤쳐모여식’ 통합론은 개입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더불어 신 전의장의 ‘역할론’도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있다. 정 전의장과 천 전장관의 경쟁에 있어 신 전의장이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미 신 전의장은 신진보연대에서 발간한 계간지 ‘신진보리포트’를 통해 주요 현안과 관련 진보진영의 호응을 얻고 있는 터다. 이와 관련, 여당 한 핵심인사는 “세가 다소 부족한 신 전의장이지만, 이슈 선점에 있어선 천·정보다 앞서 있다”고 진단했다.
이는 현 시점에서 국내로 복귀해도 뚜렷한 정치적 역할을 찾기가 어렵다는 관측에도, 정 전의장의 귀국 일정이 당겨진 이유이기도 하다. 정 전의장이 부재한 상태에서 정계개편, 대선 후보 경선 방식, 외부 선장론 등 차기 대선과 관련 큰 흐름이 공론화 장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정 전의장의 한 측근 역시 “정치권의 변화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다”고 했다. 천·신의 움직임은 정동영·김근태 전·현직 당의장 중심으로 흐르던 당내 대선 레이스가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조순형 당선’이 기폭제
그렇다 해도 천신정 부활이 곧 분열로 이어질지는 더 지켜봐야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암묵적 동의를 바탕으로 우리당을 창당한 핵심인사들이기 때문이다. 판을 새로 짜 대선을 준비하는 과정이 헤쳐모여식이라면 천신정의 ‘거취’는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다.
이는 ‘탄핵’의 주역인 조순형 민주당 의원의 당선이 몰고 온 정치권의 손익계산과도 무관치 않은 대목이다. 여당 한 핵심인사는 “새판짜기 주도권에서 여당 입장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조순형’이듯, 저쪽(민주당) 입장에서 천신정이 고민거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민주당 분당’의 1차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여권을 받치고 있는 또 다른 핵심 축인 김근태계가 현재 ‘노무현과의 결별’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 데 반해, 노 대통령을 어떻게 할 것이냐의 여부를 놓고 물밑 논의중인 또 다른 세력이 있다는 것은 천신정의 향후 진로를 예측케 한다. 노 대통령이 ‘승차’를 끝까지 고집한다면 친노그룹과 마찬가지로 천신정 그룹에도 답이 없는 게 사실이다.
아무튼, 천신정의 부활로 인해 여당의 판 새로 짜기 논의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 ‘천·신·정’ 역학관계 변천사

긴밀한 협력관계 ‘끝’

천정배 전법무부 장관과 신기남 전의장, 정동영 전의장은 ‘동기’다. 96년 당시 김대중 전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새정치국민회의에 나란히 입당했다.
하지만 정치권 입문에 있어 이들의 루트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천 전장관은 94년 현 김근태 의장이 중심으로 만든 ‘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의 사무총장으로 활동했다. 그를 두고 “한 때 김근태 계보였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신 전의장은 변호사로 활동함과 동시에 TV 토론 사회자로 유명세를 탔던 터다. 당시 법조계 영입을 담당했던 정대철 고문을 통해 입당했다. 기자 출신 앵커로서 주가가 치솟고 있었던 정 전의장은 서울대 동기인 이해찬 전국무총리의 제안으로 정치권과 연을 맺었다.
천신정이 같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때는 새천년민주당 시절이다. 2000년 민주당 최고위원 선거 뒤 계속된 당 쇄신운동 과정에서 동교동 구파에 맞서 같은 행보를 취했다. 이어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도 호흡을 맞췄다. ‘천·신·정’이란 말이 나온 시기도 이 때다. 각종 개혁과 세대교체를 주도하며 신당 방향과 해법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천 전장관은 ‘강경파’, ‘탈레반’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당시 이들의 역학관계는 정 전의장이 중심에 있었다. 정 전의장의 정치 일정은 앞서 있었고, 천 전장관과 신 전의장은 뒷받침하는 구도였다.
이들의 역학관계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또 다른 기준이다. 우선 정 전의장의 경우 민주당 경선을 완주, 민주당 대통령 후보 노무현의 형식적 명분을 세우는 데 공헌했다. 반면 천 전장관은 2002년 3월 단기필마로 민주당 당내 경선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의 곁을 지킨 단 한사람의 현역의원이었다. 신 전의장은 김근태 후보를 지지했고, 이러한 이유로 그에게도 ‘김근태 계보’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참여정부 법무부 장관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율사 출신 여권 인사들을 제치고 그가 법무부 수장에 전격 발탁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배경이 작용했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아무튼, 천신정 그룹에 미세한 균열이 나타난 때는 2004년 전당대회다. 당시 정 전의장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최고위원에 도전, 당선된 신 전의장. 이후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의장에 오른 그는 선친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조기 낙마에 이른다. 그리고 정 전의장과 신 전의장의 껄끄러운 관계는 현재진행중이다.
정 전의장과 신 전의장의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천 전장관은 정치적 도약에 성공한다. 원내대표에 당선된 것. 당시 향후 천신정 그룹의 ‘경쟁’을 예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 중 노 대통령의 개혁 정체성을 가장 강력히 받아들인 천 전장관은 법무부 장관을 하면서 유력한 제 3후보로 급부상했다.
정치에 입문한 지 10년, 이들 세 사람은 협력으로 시작해 경쟁과 긴장의 관계로 발전해왔다.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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