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억세게 운이 좋은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 후보가 되는 과정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붕우(朋友)라는 무기 하나만 가지고도 여의도를 평정하였고,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는 ‘이래문저래문’으로 반대세력이 지리멸렬하였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보다 조금이라도 잘하기만 하면 칭찬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취임 후 1년여 간은 70-80%가 넘는 국정운영 지지도를 유지했고, 그 여세를 몰아 2018년에는 3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국민들에게 문재인 대통령이 제일 잘하는 분야는 외교안보 분야로 인식되었으며, 그의 외교안보정책은 폭넓은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치명적인 핸디캡이 있었다. 그는 대통령은 물론 정치를 하려는 의사도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입체적으로 이해해야 할 종합예술인 정치를 단면적으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는 뭐든지 가능한 정치 환경이었다. 여소야대였지만, 야당은 지리멸렬했고 정부여당이 강력하게 제도개혁과 정책입법을 밀어붙이면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정부여당은 정권을 잡는 과정이 너무도 순탄했기 때문인지 실체도 없는 ‘적폐청산’이라는 공염불만 외울 뿐, 실천적으로 뭐 하나 제대로 해내는 것이 없었다. 군소야당의 ‘개혁입법연대’ 주장에 대해 메아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국내정치는 2년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그리고 집권 2년을 맞이할 즈음, 다가오는 21대 총선에서 과반수를 획득하여 ‘적폐청산’을 완성하겠다는 일념으로 패스트트랙 정국으로 몰고 갔다. 강대강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이미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도 아무 일도 하지는 않았지만, 정부여당의 반대급부(反對給付)를 얻을 수 있는 환경만큼은 만들어 놓고 있었다. 양심도 염치도 차치한 채 오로지 원내 1, 2당 간의 밥그릇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패스트트랙에 올라간 공직선거법은 세계적으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누더기 선거법이 되어 있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죽었다 깨어나도 과반수를 차지할 수 없는 선거법이 된 것이다. ‘적폐청산’의 포기다. 아니면 협치의 시작일까? 그렇다면 이미 2017년 5월부터 가능했을 것인데, 늦어도 한참 늦었고, 되지도 않을 것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립과 검경수사권 조정을 핵심으로 하는 검찰개혁안도 패스트 트랙에 올려 졌지만. 검찰은 노골적으로 반발하고 있다. 검찰개혁안을 입안한 것으로 알려진 전직 법무부장관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검찰총장은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목소리에는 귀를 닫은 지 오래다. 이런 검찰을 견제하기 위해 당대표 출신의 5선 국회의원을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하려 하고, 여당 국회의원은 필리버스터를 통해 검찰총장에게 볼멘소리를 해댄다.

삼권분립 훼손 논란이 끊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의장을 지낸 정세균 의원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여 국회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있다. 정세균 전국회의장의 국무총리 지명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의지표명임과 동시에 야당과 국회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접근하겠다는 생각의 발로일 것이다. 지난 2년 7개월 동안 가장 잘한 정치적 결정이다.

연말연시 여의도 정치권이 가소롭다. 공직선거법이 연동형이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사표를 줄이고 많은 정치세력에게 대표권을 부여하려면 비례대표를 늘리면 된다. 225:75 이미 지난번 패스트 트랙에서 합의한 내용이다. 이를 병립형으로 하면 어느 정치세력의 불만도 잠재울 수 있다.

검찰개혁은 야당이 얘기하는 독소조항만 없애면 합의 가능하다. 추미애 법무부장관도 있다. 경제 살리기와 국민통합은 정세균 국무총리의 능력에 기대를 걸어보자. 문재인 대통령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정부여당 내의 환경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그의 정치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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