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탈당 배수진 정동영 전의장
범여권 유력 대선주자인 정동영 전의장이 열린우리당과 결별 수순을 밟고 있다. 대통합을 위해 우리당 간판을 내리고 신당을 구성해야 한다는 그의 논리가 제대로 먹히지 않고 있다.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당 사수파들은 ‘지역주의로 회귀하려는 발상’이라며 정 전의장의 탈당 운운을 무시하는 분위기다. 이른바 범여권으로 통하는 이들의 내분은 5월을 기점으로 ‘루비콘강’을 건널 듯싶다.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인 정 전의장의 탈당이 몰고 올 파장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당내 지분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정 전의장에 이어 김근태 전의장도 탈당에 가세할 것으로 보여 우리당은 친노세력만 남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통합을 위한 ‘발전적 해체’가 받아들여질 여지도 없지 않다. 이렇게 되면 정 전의장의 탈당은 자연스럽게 ‘원인무효’가 될 것이다.
유력 대선주자로 사실상 ‘승부수’를 던진 정 전의장의 ‘숙제’와 향후 행보를 따라가봤다.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이자, 범여권 유력 대권주자인 정동영 전의장이 탈당이라는 ‘배수의 진’을 치고 범여권 통합을 재차 주문하고 나섰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당사수파와의 이견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따라,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친노 사수파만 남고 제3의 통합세력이 태동함으로써 한나라당과 함께 ‘3각’ 정치구도로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선, 정 전의장의 선택이 자신의 대선행보에 얼마만큼 ‘플러스 요인’이 될지 미지수다. 하지만, 정 전의장이 중요 고비 때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왔다는 점에서 그의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정당개혁 작업
그는 1974년 서울대 재학시절 유신반대 투쟁에 가담했다 구속되는 등 굴곡 있는 삶을 살아왔다.

90년대 만해도 정 전의장은 ‘정치인’이라기보다 ‘스타 앵커’로 유명세를 떨쳤다. MBC 9시 뉴스 진행자로 매일 저녁 안방을 누볐던 그가 정치권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개혁세력의 정권창출’을 위해서였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전국 최대득표를 얻어 국회에 입성한 정 전의장은 대변인, 최고위원, 당의장 등 주요 당직을 두루 거치며 유력 정치인 반열에 들어섰다. 특히 두 차례에 걸친 당내 기득권과의 싸움에서 그의 면모는 유감없이 발휘됐다.

2001년 ‘국민의정부’가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을 무렵, 이른바 ‘천신정’으로 불리던 정동영, 신기남, 천정배 의원이 당지도부와 동교동계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보스 중심의 정당문화에 반기를 들고 당쇄신을 촉구한 것이다.

또, 2003년 5월에는 새천년민주당의 낡은 정치를 비판하며, 열린우리당 창당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해 11월 정식으로 열린우리당 간판이 내걸리며 초대 당의장을 맡았고, 2004년 탄핵풍을 타고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선거 중반에 터진 ‘노인폄훼’ 발언으로 인해 3선 고지를 밟지 못했고 총선 승리의 공신자격도 사실상 상실했다. 정 전의장은 이때부터 대선을 향한 험난한 항해를 시작했다.

2004년 7월 통일부장관에 발탁된 그는 ‘통일 대통령’을 꿈꾸며 1년5개월간 남북관계의 전면에 등장했다. 한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독대를 하며 남북 화해무드에 일조하는 듯했지만, 북한의 핵실험 ‘한방’으로 공든 탑이 무너지고 말았다.

‘천신정’ 트리오도 정치 지형의 변화에 따라 동지에서 ‘남남’으로 결별 수순을 밟았다. 신기남 의원과 정동영 전의장은 2005년 4월 당의장 선거에서 개혁, 실용노선으로 갈라졌다. 또, 신 의원과 천정배 의원은 열린우리당 사수파와 신당창당파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정 전의장은 지난 4월 9일 동해 고성에서 서쪽 임진각까지 철책선을 따라 걷는 ‘평화대장정’을 추진하는 등 대권주자로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극복해야 될 난관이 산적해 있다. 좀처럼 오르지 않는 낮은 지지율, 친노그룹과의 신경전, DJ와의 관계설정 등으로 인해 그의 대선가도에 ‘빨간불’이 켜진 지 오래다. 또, 탈당설이 계속해서 회자되면서 ‘정략적 행보’로 비춰졌고 대선주자로서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마이너스’ 요인이 됐다.

이 대목에 있어서 정 전의장은 다소 억울한 측면도 있다고 말한다. ‘탈당’이 목적이 아니라, ‘통합’을 위해 목청을 돋웠지만 정치권 안팎에서 이를 순수하게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 전의장의 공보파트를 책임지고 있는 이재경 실장은 “우리는 지난 2월 전당대회에서 ‘이대로 가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대통합의 원칙에 합의했다”며 “그러나 사수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등장해 국민들과의 약속이 또 다시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다”고 주장했다.

이 실장은 또, “열린우리당으로는 어떤 정치적인 움직임도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게 사실이라면, 이제 대통합의 길로 들어가야 한다는 게 정 전의장의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대명제’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면 중대 결심, 즉 탈당을 할 수 있다는 논리다.

정 전의장은 통합에 반대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도 대립각을 세우고 ‘전면전’을 벌일 태세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과 싸워서 승리한 전례가 없다는 점은 그를 걱정하는 주변에서도 흘러나온다.


DJ 복심 못 얻으면 대권 ‘난망’
올해 대선에서도 호남민심은 승부처가 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정 전의장은 아직 호남의 ‘적자’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전대통령과의 관계설정이 애매한 탓이다. 이에 따라, 정 전의장에게 DJ는 또 하나의 ‘숙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 전의장은 범여권 후보로 거론됐던 정운찬 전서울대총장이 대선 불참을 선언한 이후 기대감이 한층 높아졌다. 동시에 그는 2003년에 이어 또 다시 통합을 기치로 내걸고 승부수를 던졌다. 그 성패여부에 따라 대선정국에서 ‘정동영’의 입지는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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