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인생사…1세대 기업인 시대 막 내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뉴시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뉴시스>

[일요서울]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롯데 측은 "어젯밤(18일)부터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중환자실에서 치료받던 신 명예회장이 향년 99세 나이로 오늘(19일) 오후 4시 30분쯤 별세했다"고 밝혔다.

'성공하겠다' 무작정 일본행..다시 돌아와서 성공 신화 이룩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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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백과 '나무위키'에 따르면 신격호 명예회장은 1921년 경상남도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빈농인 신진수(辛鎭洙)의 5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1년 부인 노순화와 둘 사이에서 낳은 딸은 신영자를 비롯해 가족과 고향을 모두 뒤로 한 채 성공하겠다면서 일본으로 밀항을 한다.

고학을 하며 어렵게 생활하던 중 1944년 기회가 찾아왔다. 성실함을 인정받아서 하나미츠(花光)라는 사람이 5만 엔이라는 거금을 빌려 주면서 공장을 해보라고 했다. 이 돈으로 전쟁통에 수요가 충분했던 커팅오일과 밥솥을 만드는 공장을 차려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공장이 폭격을 당해서 완파되는 바람에 완전히 쫄딱 망했다. 다시 하나미츠에게 빌려서 다시 커팅오일 공장을 운영하는데 1년 반 뒤에 다시 미군의 폭격으로 망했다.

1945년 광복이 되었고, 하나미츠도 살길을 찾으라 위로를 하며 거액의 투자금을 포기한다. 진짜 자살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에까지 몰렸으나, 이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고, 죽을 땐 죽더라도 자신에게 거금을 빌려준 하나미츠에게 빌린 돈이라도 갚자는 심정으로 일어섰다.

1946년엔 와세다실업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린 후 이번에는 세탁비누, 세숫비누, 포마드 크림 등 유지류를 만드는 공장을 차렸다. 다행히도 장사는 상당히 잘 되었다. 솥단지 하나로 시작해 1년 반 만에 하나미츠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고 자신에게 돈을 빌려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집 한 채까지 선물했다.

이후 신격호는 약간 남은 밑천으로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차리고 유지류나 특수고무같은 물질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당시에 시판되고 있는 껌들을 죄다 사다가 한 번씩 다 씹어보고 각각의 껌들에 한두 가지씩 존재하는 장점들을 모두 집약해서 껌을 개발했다.

그런데 신격호가 이렇게 개발한 껌이 인기가 엄청 좋아서 과자점 주인들이 서로 납품하겠다고 신격호의 연구소 앞에서 새벽부터 줄을 섰다. 이에 신격호는 투자자를 모집해서 본격적으로 회사를 차려서 껌을 팔기로 했는데, 1948년 현 롯데그룹의 모체인 (주)롯데를 세웠다. 창립 시기 일본 정부가 불량식품 단속을 위해 제정한 '식품위생법'은 오히려 롯데의 성장에 원동력이 돼 주었는데, 단속 당시 롯데껌이 타 업체보다 상품력이 앞서서 공신력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950년엔 신주쿠에 새 공장을 지었다.

당시 일본 껌 시장은 판껌 선두주자였던 '하리스'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신격호는 주력 시장이던 풍선껌 외에 판껌 시장에도 진입해 1953년엔 하리스를 따라잡았고, 1960년대까지 미스롯데 선발대회(1953년)나 TV광고 같은 홍보매체를 적극 활용해 일본 껌 시장점유율을 70%까지 올렸다. 이렇게 승부를 결정짓게 한 계기는 미국 리글리와 천연 치클을 50:50 비율로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1962년에 스위스 초콜릿 장인 막스 브락크까지 스카우트한 후 초콜릿 개발에 착수해내 1964년 '가나초콜릿'을 선보였고, 1969년엔 캔디, 1972년 아이스크림까지 각각 손을 댔다. 더 나아가 롯데애드, 롯데부동산, 패밀리, 롯데리아 등 계열사 설립에도 힘을 기울였다.

신 회장은 1967년 4월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롯데제과'를 세웠다. 신격호 자신은 사장을 맡았고, 회장엔 유창순 전 경제부총리를 추대했다. 롯데제과는 이미 일본에서 성공한 경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당시 해태, 크라운, 오리온이 장악하고 있던 한국 제과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1970년에는 껌과 과자 포장 은박지 생산을 위해 동방알미늄을 인수하여 '롯데알미늄㈜'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1970년 11월 13일 정부는 롯데제과에 3개월 제조 정지 명령을 내렸고 같은 날 박정희 대통령은 도쿄에 머물고 있던 신격호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서울에 호텔을 지어 호텔사업을 하면 롯데제과의 정지 처분을 해결해 주겠다고 지시 제안했던 것이다.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맡고 있었던 손정목 교수는 이날을 '롯데재벌 탄생이 결정된 날'로 기록하고 있다.

롯데호텔 건립은 1973년부터 본격화됐다.

2015년 7월 28일 신격호는 일본 롯데홀딩스 회장직에서 전격 해임되고 총괄회장에서 명예회장이 됐다.  이후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이 한국롯데 몰래 롯데가 인사 여럿과 함께 일본에서 자신을 제외한 차남 신동빈 회장을 포함 여섯 명의 이사들을 해임하려고 했다가 이사회에서 제동을 건 것이다. 한마디로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이 고령의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을 등에 업고, 차남 신동빈 회장 체제를 무너뜨리려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것이 된다.

문제는 장남 신동주가 처음에 해임했던 인물들에 포함된,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쓰쿠다 다카유키가 예전에 신격호 총괄회장으로부터 "잘 부탁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점. 그런 쓰쿠다를 신격호+신동주가 다시 해임했다는 것은 신격호 회장이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 장남에게 설득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기자들의 분석이 있다. 하여 차남 신동빈 측에서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는 것. 이 때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 대행 신동인 역시 신동주의 쿠데타에 가담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2015년 5월 22일 잠실 롯데월드타워를 방문하여 건설보고를 받는 모습을 밀착취재한 기사들만 봐도 노병용 롯데물산 사장과 무리 없이 대화 했다고 하거나 건설에 대한 매우 상세한 사항을 물어보며 현장의 상황을 살폈기에 위의 신동주 쿠데타-신격호 노환설을 부정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무엇보다도 신격호는 꾸준히 신동빈을 밀어주고 있었는데 이제와서 끈 다 떨어진 신동주를 다시 당긴다는 건 아귀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신격호가 신동주를 이용하여 양국 회장급에 취임한 신동빈에게 어떤 제스처를 취하며 권력의 운용과 책임에 있어서 무한대로 자유로운 상왕으로서의 포지션을 취하려고 했는데 신동빈의 갑작스러운 제스처에 당해 권력없는 상왕이 되어 버렸다고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이로 인해 본인은 1948년 회사설립 이후 처음으로 일본롯데의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이고 신동빈 체제가 확고하게 굳어질 것으로 보인다. 귀국 때 엄청난 취재진이 몰려 곤욕을 치렀다.
2016년 6월 29일, 신격호 회장이 2010년부터 치매약을 복용 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기사 보도의 출처는 롯데그룹이 아닌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 측으로 알려졌으며, 현재 진행 중인 롯데그룹의 각종 비리 의혹 문제에 자신들이 휘말릴수 있음을 우려한 신격호 회장과 신동주 측이 각종 수사를 피해가기 위해 뒤늦게 기존의 주장을 뒤집은 것으로 보인다.

2017년 6월 2일, 신격호는 대법원으로부터 한정후견인 판정을 최종적으로 받게 되면서 사실상 본인이 제대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음이 확정되고 말았다. 그리고 2017년 6월 24일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자신의 이사직 재선임안이 통과되지 않음에 따라 결국 회사의 경영일선에서 모두 물러나고 말았다. 4차에 걸친 신동주 vs 신동빈의 싸움에서는 신동빈의 완승으로 끝나게 되었고, 신격호는 자신이 세운 기업의 경영 일선에서 불명예 퇴진하게 됐다.

1세대 기업인 시대 막 내려

유족으로는 부인 시게미쓰 하츠코 여사와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 차남 신동빈 회장,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 씨와 딸 신유미 씨 등이 있다. 신춘호 농심 회장, 신경숙 씨, 신선호 일본 식품회사 산사스 사장, 신정숙 씨, 신준호 푸르밀 회장, 신정희 동화면세점 부회장이 동생이다.

한편 신 명예회장의 별세로 고 이병철 삼성 회장과 정주영 현대 회장, 구인회 LG 회장, 최종현 SK 회장 등이 재계를 이끌던 '1세대 기업인'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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