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영 소장
엄경영 소장

대선주자 부각은 아주 짧은 시간에도 가능하다. 27년 전 YS 문민정부 시절이다. 당시 이회창 국무총리는 125일간 재직했다. 그는 원칙을 고수하느라 YS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대쪽 총리’란 이름도 얻었다. 그는 총리를 그만뒀지만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18년 전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다. 대선후보 경선 초기 노 전 대통령 지지율은 한 자릿수에 그쳤다. 민주당 광주 경선에서 그는 예상을 깨고 대승했다. 본선 승리를 위해 영남후보가 필요하다는 대안후보론이 먹힌 것이다.

차이도 있다. 이 전 총리는 야당 대통령 후보로 끝났다. 거의 10여년간 야당 권력을 장악했지만 대통령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정치 경험 부재로 국민 인기를 유지하지 못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상당한 정치적 자산을 갖추고 있었다. 풍부한 정치 경험, 감동적 스토리가 계기를 만나 빛을 발한 것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에게선 이 전 총리가 오버랩된다. 2월 초 세계일보 차기 적합도 조사에서 윤 총장은 깜짝 2위를 차지했다. 수년째 보수 쪽 1위를 지킨 황교안 대표를 제친 것이다. 검찰은 지난해 8월 말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에 전격적으로 압수수색에 나섰다. 조 전 장관이 장관 후보자에 내정된 뒤였다.

조 전 장관 일가의 검찰수사는 확대됐다. 중간엔 유재수 전 부산시 부시장 감찰무마 의혹도 불거졌다. 5개월 남짓 검찰수사 동안 윤 총장은 문 대통령과 민주당에 맞선 것처럼 국민에 인식됐다. 윤 총장은 추미애 법무부장관 취임 후 더욱 돋보였다. 추 장관의 검찰 인사에서 윤 총장 사단이 대거 물갈이됐기 때문이다.

윤 총장은 대선 적합도 2위에 오른 직후 여론조사 대선후보군에서 빼 달라고 요청했다. 검찰총장은 정치 중립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윤석열 대망론’은 이미 생명을 부여받았다.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보수 유력 주자로 오르내릴 것이다. 게다가 보수 쪽엔 차기 후보군이 풍부하지 않다.

윤 총장이 떠오른 데에는 문 대통령과 민주당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집권 초엔 검찰을 적폐청산의 칼로 활용했다. 임기 중반 여권의 칼이 역할을 다할 때가 되자 돌연 검찰은 표적이 됐다. 임기 초부터 검찰개혁에 적극 나섰더라면 국민여론은 사뭇 달랐을 것이다. 유 전 부시장 감찰 무마 의혹,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은 윤 총장 부각의 자양분이 된 것이다.

더 큰 원인은 보수 무능에 있다. 보수 진영은 ‘탄핵정국’에 이어 대선-지방선거 대패에도 부진에 빠져 있다. 경쟁적 우클릭과 퇴행을 되풀이하고 있다. 총선이 두 달여 남았지만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황교안 대표를 비롯한 대부분의 보수 인사들도 비슷하다. 마치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 서로 선장을 차지하려고 싸움질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수는 때때로 부패하고 민주적이지 못했다. 과거 독재정부, 군사정부 유산도 물려받았다. 그래도 국가 경영, 경제 분야에선 능력을 평가받기도 했다. 원칙, 정도, 희생, 질서와 같은 보수적 가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보수는 무능하기까지 하다. 윤석열 대망론은 팔 할이 보수의 무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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