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자본과 수년째 싸우고 남은 건 빚더미…그래도 후회 없어”

서울시가 정씨 측에 보낸 공문. 지덕사와 관련된 정관변경 허가를 내준적이 없다고 적혀있다.(왼쪽)/정씨가 서울시에 제출한 진정서 명단(오른쪽)

“국보 1호 숭례문이 관리 소홀로 잿더미가 된 게 불과 몇 달 전입니다. 그 현판을 쓴 양녕대군의 사당까지 파헤쳐져 아파트 단지가 빼곡하게 들어서는 현실이 얼마나 울화통 터지던지…” 칠순을 훌쩍 넘긴 정덕영(74)씨의 목소리는 양녕대군을 입에 올리는 순간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지난 2004년부터 5년 가까이 재단법인 지덕사와 서울시, 대형 건설사 등을 상대로 싸움을 이어갔던 그는 최근 대법원을 무대로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 정씨는 양녕대군의 묘가 있는 지덕사의 부지 매매과정에서 부지 소유자인 재단법인 지덕사와 서울시 문화과, 또 B건설사 사이에 검은 커넥션이 있었다는 의혹을 언론에 처음 제기한 사람이다.이 사건과 관련된 수 십 건의 민·형사 소송은 서울중앙지검, 고검, 대검 등에서 모두 무혐의 처분으로 종결됐다. 그러나 이마저도 정씨는 “법조 브로커가 얽힌 로비의 대가”라며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과연 무엇이 칠순 노인의 투지를 불타게 한 걸까. 정씨가 지적한 재단법인 지덕사와 서울시가 얽힌 의혹의 실체를 짚어봤다.

문제가 된 땅은 서울 동작구 상도동 159-212번지 외 42필지로 모두 7만1055m²(약 2만1494평)에 달하는 부지다. 이곳은 원래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의 사당이 모셔진 자리였다. 양녕대군은 신필(神筆)이라 불릴 만큼 필체가 뛰어나 국보 1호인 숭례문의 현판을 직접 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부지는 재단법인 지덕사의 소유였으며 정씨는 이 땅이 국내 굴지의 건설사인 B건설사에게 불법으로 양도 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엄청난 거물과 싸워야 한다는 직감”

“양녕대군 같은 왕족의 사당과 관계된 곳이고 무엇보다 비영리단체인 재단의 땅입니다. 당연히 매매 이전에 문화재 당국의 까다로운 심사와 검증이 필수 아닙니까. 그런데 수 만평에 달하는 땅을 파는데 필요한 정관변경 절차가 달랑 하루 만에 졸속으로 이뤄졌습니다. 문제의 재단은 땅을 판 대가로 수 천 억원을 거머쥐었고요.”

정씨에 따르면 서울시는 비영리재단인 재단법인 지덕사의 정관을 서둘러 변경해줬다. 일반 기업의 이사진의 회의와 의결을 거쳐야하는 사항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 서울시에 곧장 정보공개를 요청했지. 그랬더니 ‘지덕사와 관련된 어떠한 정관변경신청을 받은 적도 없고 허가를 해준 적도 없다’는 공문이 도착한 겁니다. 지덕사 재단이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지덕사 L이사장은 양녕대군의 토지를 매각하기 위해 2004년 당시 주무관청인 서울시에 여러 번 기본재산처분승인서를 제출했지만 서울시는 매번 이를 돌려보냈다. 그러자 L씨는 기본재산으로 돼 있던 양녕대군의 토지를 ‘보통재산’으로 바꾸는 정관변경을 신청한 것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문제가 꼬인 거죠. 보통 수일에서 수개월씩 걸리는 정관변경이 단 하루 만에 승인됐거든요. 서울시나 유력기관에 연줄이 없고서는 이럴 수가 없는 겁니다. 그 귀한 땅을 하루아침에 공사장 부지로 내몬 거나 다름없어요.”

현재 지덕사의 주무관청인 동작구청 관계자는 “정관변경이라는 게 하루 만에 처리될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L이사장이 정관변경 신청을 낸 날은 2004년 4월 23일, 승인 날짜도 같은 날인 4월 23일이다.

정씨를 비롯한 상도동 주민들이 격렬하게 항의하자 서울시는 다음 달인 5월 13일자로 공문을 보내왔다. 그 문서에 따르면 서울시는 “지난달 재단법인 지덕사에서 제출한 서류에 따르면 재산처분 추인 요청서는 재단법인 지덕사의 자체 사정에 따라 2004년 4월 20일 시에 취하원을 접수해 취하됐으며 이후 현재까지 지덕사에서 추가로 서울시에 기본재산처분추인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말이 안 되는 거죠. 4월 20일에 취하된 것을 23일에 다시 허가를 받았다니. 적어도 23일에 받은 정관변경 허가 관련 문서는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깁니다.”

정씨는 일흔을 훌쩍 넘긴 고령에도 지덕사와 B건설사를 상대로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8일 서울 시내 한 카페에서 만난 정씨는 심적으로 부담감이 큰 듯했지만 절대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5년 가까이 개인적인 생활을 포기하다시피하고 이 사건에만 매달렸습니다. 정작 돌아오는 것은 늘어나는 소송 빚과 파탄에 이른 가정뿐이었죠. KBS, MBC 등 방송사는 물론 웬만한 신문사는 다 발품을 팔며 제보를 했지만 취재만 해갈 뿐 제대로 보도해 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침 <일요서울>을 통해 처음으로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돼 아직은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정씨와 ‘지덕사 토지권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소망은 소박하다. 그저 평생을 살아온 집터와 양녕대군의 기가 숨 쉬는 땅을 고스란히 지키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런 그들에게 지덕사 L이사장은 협박과 회유도 수차례 반복했다는 게 정씨의 주장이다.


“중앙 언론사들 제대로 보도 안 해”

“흥신소 직원을 붙여 내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는 건 기본이었지요. 신변에 위협을 가하는 건 물론이고, 아예 돈다발을 들고 와 나만 조용히 물러나 주면 거액을 챙겨주겠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온갖 편법을 휘두르는 권력에 맞서 싸워온 세월이 5년. 정씨는 이나마도 더 이상 기력이 떨어지면 제풀에 지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아직까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데 혹여 너무 힘든 싸움이 될까 두려운 마음은 들지요. 우리나라에선 늙은 한 몸 쉴 집과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길이 너무도 험난하다는 사실만 배웠을 따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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