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물 뒤집어 쓴 봉하마을 봄이 와도 분위기는 썰렁

권영숙 · 노건평

노무현 전 대통령 주변에 검은 먹구름이 끼고 있다. 정권 교체 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로 낙향해 유유자적 지내왔으나 박연차 게이트의 불똥이 봉하마을로 튀면서 노 전 대통령과 그 주변은 비상시국을 맞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 여사가 박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발표한 지 나흘째인 지난 10일 봉하마을은 봄기운이 무색하리만큼 차디찬 기운이 냉랭히 감돌았다. 노 전 대통령은 일단 사태의 추이를 좀 더 지켜보자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일각에선 ‘친노’ 인사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가까운 시일 안에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에 대비한 의견조율을 하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 내외에 직접 돈을 전달했다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진술에 따라 이번 주를 수사의 분수령으로 삼을 전망이다. 세간의 관심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와 그 결과에 쏠려 있다. 이에 노 전 대통령과 봉하마을의 표정을 엿보았다.

검찰이 청와대 경내에서 박 회장의 돈 100만 달러를 건네받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노 전 대통령 사저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문용욱 비서관을 비롯해 다른 비서관들은 오전 7시 10분께 사저로 출근했다. 평소 출근시간이 비교적 여유 있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내부적으로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 같은 분위기는 노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100만달러를 받았다는 보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盧, 철저한 검찰수사 대비

노 전 대통령은 지난 8일 밤 직접 운영하는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글을 남겨 눈길을 끌었다. 이 글의 제목은 ‘부탁드립니다’였다. 전날 박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고백한 글의 제목은 ‘사과드립니다’였다.

노 전 대통령은 이 글에서 “제가 알고 있는 진실과 검찰이 의심하고 있는 프레임이 같지는 않을 것”이라며 검찰과 일부에서 제기된 의혹들을 부정했다. 이어 “제 생각은 잘못은 잘못이라는 쪽이다. 좀 지켜보자는 말씀도 함께 드린다”고 당부했다.

또 노 전 대통령은 “이번 일을 계기로 한 특별한 행사나 방문은 계획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멀리서 실망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리면 좋겠다. 저도, 여러분도 욕 먹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고 홈페이지에 지지자들이 모금운동이나 봉하마을 위로 방문을 제안한 것에 대해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노 전 대통령은 현재 주변인들 만나는 것을 모두 중단한 채 측근들과 함께 검찰 수사를 주시하고 있다. 바깥출입도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취재진들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의 김경수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이) 사저 내실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최근 많아졌고, 내실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비서진도 잘 모른다. 참모들과 이번 문제를 상의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노 전 대통령이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또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인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노 전 대통령이 사과문을 발표하기 전에 나를 포함해 측근들과 모임을 가졌다”고 언론에 밝힌 바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사과문을 작성하는데도 여러모로 신경 쓸 만큼 민감하다는 얘기다. 노 전 대통령의 측근 중에서도 법률가 출신들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이 모임은 검찰 수사가 본격화된 지난 3월 초부터 수차례 열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 모임에는 문재인 전 비서실장(변호사) 외에 노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인 정재성 변호사도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전 비서실장, 정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이 변호사시절 몸 담았던 부산지역 최대 로펌인 법무법인 ‘부산’에 속해 있다.

문 전 실장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이 지난 7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대(對) 국민사과문의 내용과 수위는 이 모임의 법률가들이 면밀히 검토해 결정한 것으로 검찰 수사에 대비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도 지난 3월 초부터 수시로 봉하마을을 찾아 노 전 대통령과 검찰수사 대비책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는 최근 거의 사저 밖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내실에서 혼자 머물거나 가끔 측근들과 통화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일 오전에는 양정철 전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 등 3명이 2시간가량 머문 뒤 돌아갔고 오후에는 친지가 방문했다. 김경수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 내외는 평소처럼 생활하시며 사저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다”고 전했다.


측근들 줄줄이 사법처리 고민

노 전 대통령이 ‘권 여사가 박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발표한 이후 봉하마을은 밤낮 할 것 없이 방송·신문사에서 나온 취재진들로 북적이고 있다.

또 박 회장의 정관계 로비의혹을 수사중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검사장 이인규)는 지난 10일 노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 연철호씨를 체포,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이날 오전 경기 분당에 있는 연씨의 자택에 수사팀을 보내 그를 체포하는 동시에 자택과 사무실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 관련 자료를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사저 주변의 긴장감은 더욱 커진 상태다. 노 전 대통령측은 100만 달러를 청와대에서 받았다는 보도와 관련해 “사실과 다르며 검찰이 일방적인 주장을 흘리는 것은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박 회장은 노 전 대통령 퇴임 직전인 지난해 2월 홍콩 APC 계좌에서 500만 달러를 연씨의 계좌로 송금, 이 돈의 주인과 용처를 둘러싸고 갖은 의혹이 제기돼 왔다. 이 돈거래에는 박 회장으로부터 4억여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은 물론, 노 전 대통령의 아들 건호씨도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 전 비서관은 박 회장에게 연씨의 사업에 투자하도록 권유했고, 건호씨는 연씨와 함께 박 회장의 베트남 공장에 찾아가 500만 달러를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연씨를 상대로 돈이 노 전 대통령의 몫으로 건네진 것인지, 노 전 대통령이 이를 알고 있었는지를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춰 이 돈의 명목과 용처 등을 조사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박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 수사가 진전되면서 노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 줄줄이 사법 처리되면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압박이 극에 달하고 있다. 지난해 노 전 대통령의 친형 건평씨를 구속했던 검찰은 지난달 26일 ‘오른팔’로 불린 이광재 의원을 구속했고, 이제는 부인 권양숙 여사마저 검찰 소환조사를 눈앞에 두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친구인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체포되면서 이번 수사와 관련, 사법처리되거나 검찰 조사를 받은 노 전 대통령 측근은 모두 7명으로 늘었다.


검찰수사에 초조한 盧

중수부 수사는 노 전 대통령을 사법처리하는 수순을 밟아가고 있다. 수사 속도도 빨라질 전망이다. 다양한 의혹의 종착지인 노 전 대통령을 조사하기 위해 먼저 해결해야 할 게 많기 때문이다. 돈의 수수에 노 전 대통령이 개입했는지 확인하는 게 관건이다. 검찰은 이미 이를 입증할 증거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을 소환은 이르면 이번 주가 될 수도 있다. 연씨가 송금받은 500만 달러와 관련해서도 노 전 대통령은 조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검찰은 이 돈의 수혜자를 건호씨로 판단하고 있다. 아들에게 전해진 돈은 고스란히 아버지의 혐의 내용이 될 수 있다. 대통령인 아버지를 보고서 준 돈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에 검찰은 지난 10일 건호씨에게 소환을 통보했다. 건호씨는 박 회장의 5백만 달러가 연씨에게 송금되기 전 연씨와 함께 박 회장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귀국한 건호씨를 상대로 5백만 달러의 최종 목적지 등을 조사할 예정이다.

또 노 전 대통령은 국가기록물 유출 사건과 고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유족이 낸 명예훼손 사건과 관련해서도 조사를 받아야 한다.

한편 노 전 대통령의 사저를 비롯해 형 건평씨의 자택, 자본금 70억원의 출처에 대한 의혹을 받고 있는 ㈜봉화 사무실 등이 모여 있는 봉하마을이 박연차 게이트로 주목을 받으면서 마을 주민들의 한숨소리가 커지고 있다. 마을주민들은 봉하마을이 마치 비리의 온상처럼 낙인찍히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이 때문인지 노 전 대통령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기자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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