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에서 시작된 등반의 꿈, 산의 품에 잠들다

상명대학교는 체육학과 석사과정에 재학중인 고미영 학우의 실종소식을 듣고 큰 슬픈에 잠겼다. 주 파키스탄 한국대사관에서 밝힌 사망소식에 모든 교직원과 학생들이 충격에 빠진 월요일을 맞이했다. 지난해 4월 3일 연예인 봉사모임 '사랑의 밥차' 절단장애인들과 함께 '희망원정대' 라는 이름으로 히말라야 고지에 위치한 랑탕의 만년설 나야칸카봉(해발 5천846m)에 오르던 故 고미영(가운데) 산악인의 모습 (오른쪽 사진)

히말라야 14좌 정복을 노리던 여성 산악인 고미영씨가 목표를 3좌 앞두고 실족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낭가파르밧을 오르는 중 빚어진 사고였다. 철녀로 불렸던 고미영씨는 오은선씨와 함께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개봉 완등을 꿈꾸고 있었다. 특히 여성 산악인으로서는 최초로 봄 시즌에만 히말라야 3개봉 등정에 성공하며 14좌 완등을 3개만 남겨놓은 상태여서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이를 두고 산악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도전도 좋지만 경쟁사들의 기록경쟁, 마케팅에는 문제가 없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산악인 고미영씨의 죽음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애도의 물결이 일고 있다. 불과 41세의 나이로 히말라야 14좌 정복을 목적으로 등반했던 산악인이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것이다.

대기록 달성을 불과 3개좌 앞둔 상황에서 날아든 비보여서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불과 캠프 100m 앞두고

고씨는 현지시각 7월 11일 낭가파르밧 정상에 오른 뒤 하산하다 사고를 당했다. 오후 7시30분께 해발 6200m 지점의 캠프2를 불과 100m 앞둔 상황이었다. 사고지점은 눈사태와 낙석이 많아 로프를 사용할 수 없는 구간이었다.

기상이 악화되어 수색을 하지 못하다가 다음 날에야 헬기를 이용한 수색이 시작, 사고 발생 20시간이 지난 시점에서야 고씨의 모습이 확인됐다. 하지만 실족 지점에서 추락해 무려 1500m 아래에서 발견된 고씨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고 머리 쪽엔 출혈 흔적이 뚜렷하는 등 사망의 징조가 분명했다.

대책본부는 파키스탄 스카루드에서 출발한 구조헬기 2대가 현지시각 오전 10시30분 베이스캠프에 도착, 본격적인 수색에 들어가자 30분 단위로 현지 상황을 체크하며 실낱같은 낭보를 기대했다. 하지만 결국 파키스탄 대사관에 의해 사망이 확인됐다.

고씨가 사고를 당한 낭가파르밧은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해발 8125m의 고봉이다. 세계적으로 등반에 성공한 산악인이 불과 14명에 불과할 정도로 위험한 곳으로 꼽힌다.

그는 15시간 사투 끝에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오른 후 “존경하는 전설적인 산악인 헤르만 불이 처음으로 등정한 낭가파르바트에 올라 감격스럽다. 남은 3개 봉도 안전하게 등정해 대한민국 여성의 기상을 전 세계에 떨치겠다”고 베이스캠프로 무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공무원에서 산악인으로

고씨 도전은 안정된 공무원의 길을 버리고 스포츠클라이머로 직업을 바꾸면서 시작됐다. 농림부 소속이었던 그가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버리게 된 계기는 바로 야유회였다. 당시 경기도 가평 명지산을 올랐던 것이 계기가 돼 등산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던 것이다.

그때부터 고씨는 국내 명산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프랑스로 등반유학을 떠났다. 전북 부안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동네방네 뛰놀며 30분 거리의 중학교를 매일 걸어다닌 것이 체력의 기반이 됐다.

고씨는 1991년 코오롱등산학교를 통해 산과 인연을 맺은 뒤 국내외 대회를 휩쓸며 세계적 스포츠클라이머로 이름을 알렸다. 1995년 대한산악연맹대회 스포츠클라이밍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해 2002년 대한민국 산악상(등반 부문)을 받았고, 2003년에는 제12회 아시아인공암벽등반대회 여자부에서 우승했다.

고씨가 스포츠클라이머에서 고산등반가로 또 다시 변신하게 된 것은 2005년 해발 6447m인 파키스탄의 드리피카 원정에서부터다. 드리피카는 위험성으로 인해 산악인들이 가장 꺼려하기로 유명한 산이다. 실제 고씨도 등반 도중 로프가 끊어져 60m 아래로 추락하기까지 했다. 당시 그는 허리가 다치는 중상을 입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정상을 밟았다.

고씨의 등반은 이때부터 ‘불도저’처럼 숨 가쁘게 진행됐다. 2006년 8201m 초오유에 이어 2007년 5월부터 10월까지 8848m 에베레스트, 8047m 브로드피크, 8012m 시샤팡마를 차례로 올랐으며 2008년에는 8516m 로체, 8611m K2, 8156m 마나슬루를, 올해는 8463m 마칼루, 8586m, 칸첸중가, 8167m 다울라기리를 연이어 정복하면서 10개 봉을 돌파하는 저력을 보였다.

고미영은 비록 하산길에 사망했지만, 이번 낭가파르밧 등정은 11좌 등정 성공으로 인정받게 된다. 대한산악연맹의 한 관계자는 “정상 등정시 카메라와 동행 셀파 등의 객관적 자료가 있으면, 하산길에 사망했더라고 등정을 인정받게 된다”고 밝혔다.


숨 가쁜 일정, 경쟁 논란

한편 고씨의 죽음의 배경은 산악인 사이에서 적잖은 논란이 되고 있다. 사실 히말라야 8000m급 14좌 가운데 이미 11개 봉우리를 밟았지만 고씨의 이름이 산악계에 알려진 것은 3년이 되지 않는다. 그만큼 촉박한 일정을 강행했다는 것이다. 실제 고씨는 한 해에 8000m급 봉우리를 3, 4개씩 오르는 강행군을 해 왔다. 이를 위해 한 봉우리를 등정한 후 휴식을 취하지 않고 헬기로 다른 봉우리의 베이스캠프로 이동하는 ‘속공 등반’을 감행하기도 했다.

때문에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고씨와 오은선씨가 히말라야 8000m 고봉 14좌 첫 완등을 놓고 과열 경쟁을 벌이다가 불거진 사고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산악인 허영호씨는 지난 13일 CBS라디오에 출연, “등반은 음미하면서 해야 하는데 이것을 스포츠처럼 경쟁적으로 하다보면 거기에 따른 무리라는 게 있다”며 무리한 경쟁을 이번 사고의 원인으로 꼽았다. 허씨는 “8000m 고봉 3, 4개를 1년 사이에 등정하려고 하니까 이런 안타까운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이같은 주장이 벌어지는 배경은 14좌 첫 완등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 위한 후원 업체와 언론사의 이해가 고씨의 등반 일정에 적잖은 영향을 줬다는 추측에서 시작된다.

실제로 두 산악인이 세계 기록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오씨의 후우너자인 블랙야크(동진레저) 강태선 대표가 현지에 머물며 오 대장을 지원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코오롱스포츠(FnC코오롱) 역시 최근 임직원을 현지로 급파해 고씨를 지원하기도 했다. 물론 등반 일정은 전적으로 등반대장이 결정한다. 하지만 후원사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1억원이 넘는 등정 비용을 개인이 조달하기 힘든 데다 스타가 돼야 후원을 받을 수 있어 등반대 역시 무리하게 일정을 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용 때문에 등반 패턴이 바뀌고 있는 것도 문제다. 한 번 등정에 1억~2억원을 넘어서는 비용 때문에 후원사들은 베이스 두 곳에 머물며 한 번 등정할 때 2~3개봉을 한 번에 오르는 방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우연한 사고’일 뿐이라고 반박도 있다. 해발 수천m의 고지대에 오르기 위해선 ‘고소 적응기간’이 필요하다. 해발이 높아질수록 산소가 희박해지기 때문에 인체가 고지대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연속적인 등반이 오랜 기간 쉬었다가 다른 도전에 나서는 것보다 필요한 적응기간을 줄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코오롱등산학교 이용대 교장은 “고씨는 신체적으로 타고난 고소 적응력을 지닌 데다가 연속적인 등반 스케줄에 맞춰 개인적인 훈련도 많이 했다”고 밝혔다. 한 봉우리를 정복하고 나서 한국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것보다 히말라야 부근에 베이스캠프를 차려놓고 헬기로 가까운 거리를 이동할 경우 고산지대 적응기간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유족 측도 이런 논란을 ‘오해’라고 일축했다.

유족들은 “오은선과 고미영 모두 한국여성산악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다. 사적으로 행동할 때 둘은 언제나 동행할 정도로 매우 가까운 사이다”라며 “회사 측도 누구보다 미영이의 안전을 먼저 생각했다”라고 반박했다.

한편 고씨 가족들은 “미영이가 못 올라간 3개 봉 가운데 2개 봉에 유골의 일부분을 뿌려 달라고 오은선씨에게 부탁하고, 나머지 유골은 김재수 대장에게 뿌려 달라고 요청해 히말라야 14좌 등정을 마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가족들은 지금 히말라야에 비가 와 헬기를 통한 구조가 지연되고 있지만 시신을 수습하면 현지에서 화장해 서울 국립의료원에 빈소를 차릴 계획이다. 전북 부안 선산에 놓을 묘비도 주문했다. ‘히말라야 11좌 등정 산악인 고미영’이 묘비의 문구다.


#고미영 프로필

▶가족관계 : 2남 4녀중 막내
▶키·몸무게 : 160㎝, 48㎏
▶학력 : 상명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석사과정 재학
▶등산입문 : 1991년 코오롱등산학교
▶등반경력 : 2005년 드리피카(6447m)
2006년 초오유(8201m)
2007년 에베레스트(8848m)
브로드피크(8047m)
시샤팡마(8012m)
2008년 로체(8516m)
K2(8611m)
마나슬루(8156m)
2009년 마칼루(8463m)
캉첸중가(8586m)
다울라기리1봉(8167m)
낭가파르바트(8125m)


##‘여성 히말라야 정복 꿈’ 이어진다

고미영씨가 실족 사고로 히말라야 정복의 꿈을 접게 되자 경쟁자인 오은선씨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14좌 여성 최초 완등’을 목표로 내걸었었다. 하지만 4시간 차이로 오른 낭가파르밧에서 이 둘의 생사가 갈렸다.

앞서 오씨가 지난 10일 오후 4시47분 오씨가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오른 데 이어 고씨가 4시간도 지나지 않은 오후 8시30분 정상을 밟았다. 오씨는 12개째, 고씨는 11개째 8000m급 완등이었다.

이 두 사람은 불과 몇 년 사이에 각각 10개가 넘는 고봉을 넘는 등 정상을 밟아나가며 경쟁을 벌여 왔다. 고씨의 사고 이후 오씨와 후원사인 블랙야크의 홈페이지에는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과 오 대장에게 격려의 뜻을 전하는 네티즌들의 메시지로 가득 찼다.

한 네티즌은 “조심하셔서 못 다 이룬 고씨의 꿈인 14좌 완등을 이뤄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현재 오은선 대장은 모든 일정을 미룬 채 사고 뒷수습에 매진하고 있다. 블랙야크 측은 홈페이지를 통해 오은선 대장은 사고가 수습될 때까지 현지에 남아 있을 예정이라고 전했다.

[강필성 기자] feel@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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