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 잃지않고, 뜻 굽히지 않는다”

지난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조문을 마친 반기문 UN사무총창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위) · 지난 15일 영국 찰스 왕세자(가운데서 왼쪽)와 덴마크 라르스 로케 라스무센 총리(가운데서 오른쪽)와 함께 코펜하겐 벨라센터에서 열린 최고위급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취임 3년을 맞이했다. 그는 지난 2006년 12월 14일 역대 최초로 유엔헌장에 손을 얹고 유엔총회에서 취임선서를 하였다. 당시 반 총장은 “양심에 따라 유엔의 이익을 위해 사무총장에게 주어진 모든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어떤 정부나 다른 어떤 누구의 지시도 따르지 않을 것을 선서한다”고 다짐했다. 이후 3년이 지난 현재도 그의 리더십은 중립을 고수하고 있다. 일각에선 너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지 않는 것은 근무불이행이라는 곱지않은 시선도 있지만 있지만 반 총장의 리더십만큼은 각광받는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요서울]은 코펜하겐 기후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분주한 모습을 보이는 반 사무총장의 리더십을 재조명해본다.

“저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부여된 역할들을 충성과 분별, 양심을 모아 행사하며, 어떤 정부나 외부기관의 지시도 추구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유엔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것임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세계의 최고의 외교관’, ‘세계의 대통령’으로 일컬어지는 유엔 사무총장.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역사적 취임 선서식을 갖은 반기문 사무총장이 취임 3년을 맞이했다.

2006년 12월 유엔헌장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한 이후 그는 그동안 많은 분쟁지역을 돌아다니면서 UN사무총장으로서의 가교역할을 다했다. 더욱이 지난 3년간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면서 기후변화 문제를 전 세계적 이슈로 끌어 올린 것이 최고의 업적으로 꼽힌다. 이에 반 총장은 지난 9월 유엔 기후변화 정상회의에 이어 이번에 열리는 코펜하겐 기후협의 회의에서도 110개국 정상들이 참석을 통보해 나름의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


워커홀릭형 사무총장

반 총장은 휴가 중이던 지난 9월에도 유엔협회세계연맹 총회에 참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세계환경포럼, 여수엑스포 등 여러 행사에 참석했다. 또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국제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한승수 전 총리를 비롯한 정부관계자들도 잇달아 만났다

때문에 연임의사를 첨병하기도 전에 그의 앞날에 대한 밝은 전망이 수두룩하다. 일각에선 그의 목소리가 강하지 못하다는 비난 여론도 있지만, 그는 자신만의 생각으로 탈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6월에는 유력언론사가 ‘목소리가 작다’는 비판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실제로 반 사무총장이 지역분쟁이나 인권 문제에 보다 강한 메시지를 내지 않는다는 비판은 어제 오늘일만은 아니다. 최근 열리고 있는 코펜하겐 기후회담에서도 지적됐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지난 12일 반 총장에게 코펜하겐 기후회담에서 진정한 열정과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고 피력했다. 슈피겔은 “반 총장이 취임 이후 유엔 수장으로서 이끌어낸 성과가 거의 없다”고 꼬집었다.

이런 지적에 대해 반 총창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보는 시각에 따라 그렇게 비판할 수 있어요. 강한 메시지를 전하면 어느 한쪽 입장에서는 그걸 좋아하겠지만, 다른 당사국으로부터는 비판과 항의가 들어오지요. 저는 민주주의·인권·여성 지위 향상 등 인류 보편적 가치에서는 소신 있게 말합니다. 기후변화·식량·빈곤 등 지구적인 문제에서도 제 운신의 폭이 넓습니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얽힌 지역분쟁 같은 이슈에서는 ‘중개자’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분쟁을 해결하려면 제가 정직한 중개자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유엔은 국가 정부처럼 확실한 입장을 낼 수가 없습니다”고 반박했다. 그만큼 중간자의 입장을 고수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반 사무총장은 지금도 자신의 목소리보다 이익이 돼는 쪽을 택한다고 한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성향으로 UN사무국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2004년 6월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해 살해된 ‘김선일씨 피살 사건’이 대인 기피증으로 나타났다. 당시 국내 주요언론들은 취약한 외교 인프라와 외교협상 부재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그 안에는 반 사무총장(당시 외교통상부 장관)도 있었다.

정치권과 진보단체에서는 반 총장의 외교협상은 “미국의 부시형 공개 경고와도 닮았다”며 ‘친미적 외교장관’이라는 공격적 비난이 잇따랐다.

반 장관은 당시 이라크 무장단체들에 피랍된 김선일씨를 구하기 위해 알자지라 TV동경 특파원을 자신의 사무실에 불러 영어로 협상했다. 그러나 결국 김선일씨가 피살되자 모든 책임은 반 장관의 몫이 됐다. 무엇보다 비슷한 시기에 피랍된 일본인은 무사히 석방돼 당시 일본의 협상채널(민간구호 활동과 종교적 접근 등)과도 비교됐다.

반 장관은 이로 인해 한동안 사람과의 만남을 꺼려했다. 그는 당시 “너무 매도당해 사람 만나기가 무섭다”며 “최근 일련의 사태로 대인기피증이 생겨 사람을 만나지 않고 있다”고 말할 만큼 심적 고생이 심했던 것이다.


‘영어신동’ 으로 유명,

반 장관에 대한 주위의 평가는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겸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곧 외유내강 형으로 겉으로는 따뜻하지만 안으로 독기를 품고 있다는 평가이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이뤄 내는 강한 의지를 가졌다’고 반 장관을 잘 아는 지인들은 한 목소리를 낸다. 그의 이런 강한 심성은 유엔 사무총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의 행보를 살펴보면 바로 드러난다. 반 장관은 지난 해 10월, 정부가 내부 논의절차를 거쳐 유엔사무총장 후보로 확정한 뒤 조용하면서도 철두철미하게 전 세계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뛰어 다녔다.

반 장관은 또한 재미없는 사람으로 통한다. 잘 할 줄 아는 취미도 없고 오로지 일에만 몰두한다고 해서 내려진 평가다.

반 장관 스스로도 “대학 시절 바둑의 취미를 가져보려 했지만 그 보다는 학습에 시간을 더 집중하고 싶어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대학 친구들은 그를 늘 공부만 하는 ‘범생이’라고 기억할 만큼 특별히 취미나 놀이문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를 공부벌레로 만든 건 어릴 때부터 일치감치 꿈꿔왔던 외교관의 길 때문이다.

반 장관은 어릴 적부터 ‘영어신동’으로 통할 만큼 외국어 구사능력이 남달랐다. 그는 적십자사와도 인연이 깊다. 충북 음성에서 출생한 그는 1962년 충주고 3학년 시절, 미국 정부가 주최한 영어웅변대회에 출전해 입상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이 때 인생에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계기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평생의 동반자’와 그의 ‘비전’이었다. 인연의 배필이 된 지금의 부인 유순택 여사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이 시절이다. 반 장관은 당시 충주여고 학생회장이던 유 여사와 충주고와 충주여고 학생단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첫 대면했다. 그 뒤 영어 웅변대회 입상으로 미국 방문 길에 오르던 환송식에서 유 여사는 충주여고 대표로 반 장관에게 꽃다발과 복주머니를 만들어 안겨준 것이다. 그가 외교관의 꿈을 키운 것도 미국 적십자사 주선으로 워싱턴에서 존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면서부터다. 그 자리에서 장래희망이 ‘외교관’이라고 당차게 말해 주위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그는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고 외교관이라는 꿈을 다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반 장관의 인생에 후덕한 자양분을 공급해 준 인물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의 어머니인 신현준 씨다. 신 씨는 늘 “타인과 다투지 말고 덕을 베풀고 살라”는 교육 방식을 고수하며 아들을 챙겼다고 한다. 반 장관이 ‘적(敵)이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겸손한 태도와 주변인과도 폭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 모두 반 장관 어머니의 교육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온화하지만 뚝심 있는 모습 보여

1970년 제3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반 장관은 그 이듬해인 1971년 유 여사와 결혼해 월세 10만원의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의 능력은 2001년 9월 당시 한승수 외교부장관이 겸임했던 제56차 유엔총회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되면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9·11 사건으로 유엔 차원의 테러방지에 적극적이던 때, 그는 각 국가 간 이견 조율 업무를 훌륭히 수행해 명성을 쌓았다. 그는 이 때 장관답지 않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학자적 외모로 대중들에게 탁월한 외교술을 선보였다. 반 장관이 대중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유엔 사람들과 친할 수 있는 계기였고, 오늘날 유엔 사무총장에 도전할 수 있는 충분한 자양분이 된 것 같다”는 소감을 밝혔다.

더욱이 그는 일요일 출근은 물론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게 몸에 배어있을 만큼 성실하다. 해외 출장의 경우에도 시차를 감안해 비행기에서 숙박을 취하는 등 일에 대한 그의 욕심은 남다르다. 또한 아무리 바빠도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에게 반드시 회신을 해주고 연하장을 보낼 때도 직접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정계 진출을 원하는 인사들도 늘어났다. 하지만 그는 손사래 친다.

반 사무총장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요만큼도 생각해 보거나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럴 만한 자질을 갖고 있지도 않아요.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제가 사무총장으로 일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

[이범희 기자]skycros@dailysun.co.kr


#반기문 UN사무총장 프로필

학력
▶1963 충주고등학교
▶1970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학사)
▶1985 미국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 (행정학 석사)

경력
▶1970.02 제3회 외무고시 합격
▶1970.05 외무부 입부
<생략>
▶2000.01.27~2001.04.01 제35대 외교통상부 차관
▶2001.05~2002.09 제56차 유엔총회 의장비서실장
▶2003.02.25~2004.01.16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
▶2004.01.17~2006.11.09 제33대 외교통상부 장관
▶2005.02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정부위원
▶2006.12 현) 유엔 사무총장

상훈
▶1975.02 녹조근정훈장
▶1986.12 홍조근정훈장
▶2001.11 오스트리아 명예대훈장
▶2002.02 브라질 리오블랑코대십자훈장
▶2004.09.23 밴 플리트상 (코리아소사이어티)
▶2002.02 브라질 리오블랑코대십자훈장
▶2006.03.17 페루 태양 대십자 훈장
▶2006 헝가리 자유의 영웅 기념 메달
▶2006 알제리 국가유공훈장
▶2006.12 제6회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한국언론인연합회)
▶2007.01 제3회 한국 이미지 디딤돌상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
▶2007.03 제9회 관악대상
▶2007.05 제1회 포니정 혁신상 (포니정재단)
▶2008 국제로터리 영예의 상
▶2008.10 최고훈장 (필리핀)
▶2009.08.12 여수시 명예시민 (여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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