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패션계의 거장 ‘앙드레 김’ 타계
한국 패션계의 거장 ‘앙드레 김’ 타계
  • 전성무 기자
  • 입력 2010-08-17 13:20
  • 승인 2010.08.17 13:20
  • 호수 851
  • 6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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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 “한국 ‘패션의 역사’로 남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본명 김봉남)이 지병인 대장암에 폐렴증세까지 겹쳐 지난 8월 12일 타계했다. 앙드레김은 국내 남성 패션디자이너 1호로 통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앙드레 김 패션쇼는 ‘스타 등용문’ 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여서 그의 패션쇼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연예인들에겐 선망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1999년 ‘옷 로비 사건’은 앙드레 김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다. 이 사건에 연루돼 국회 청문회 참고인으로 나서면서 자신의 본명이 알려지자 세간의 웃음거리가 된 것. 한국 패션계의 거장 앙드레 김의 생애를 돌아봤다.

12일 타계한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국내 남성 패션디자이너 1호’로서 한국 패션계에서 굵직한 유산을 남겼다.

1935년 경기도 고양시 출생인 앙드레 김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 갔던 부산에서 디자이너의 꿈을 키워나갔다. 어린시절 피난 중에 부산에서 봤던 외국 영화의 여배우와 의상을 보면서 옷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누이와 여동생을 모델로 삼아 예쁜 옷을 입은 여성을 그리며 디자이너의 기본기를 다져나갔다.

앙드레 김의 2002년 회고록 ‘마이 판타지’에서 자신이 디자이너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은 오드리 햅번이 주연한 영화 ‘퍼니 페이스’를 본 뒤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 출신의 톱 디자이너 지방시의 의상이 여러 벌 나오는 이 영화를 통해 그는 ‘여성의 아름다운 꿈을 실현하는 옷을 만드는데 평생을 걸겠다’고 다짐했다.

1962년 반도호텔서 패션계 데뷔

그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홀로 서울로 올라와 디자이너 최경자의 양장점에서 일했다. 1961년 최경자가 국제복장학원을 설립하자 1기생으로 입학해 디자이너 수업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30명의 입학생 중 단 세 명에 불과했던 남학생 중 한 명이었던 앙드레 김에 대해 최경자는 자서전에서 “재능이 많고 감각이 뛰어났던 제자였다”고 평가했다.

국제복장학원 1년 과정을 수류한 앙드레 김은 1962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패션쇼를 열고 화려하게 패션계에 데뷔했다. 이후 소공동에 ‘살롱 드 앙드레’라는 이름의 의상실을 열었다. 당시 앙드레 김은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호텔 앞에 있는 양복점 ‘GQ테일러’에 찾아가 쇼윈도 중 하나만 빌려 달라고 해서 양복점 한켠을 빌려 연 의상실이었다.

이 때 의상실의 앙드레라는 이름은 당시 프랑스 대사관의 한 외교관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려면 부르기 쉬운 외국 이름이 있어야 한다”면서 붙여준 것이다. 이 때부터 앙드레 김의 본격적인 세계 진출이 시작된다. 1966년 프랑스 의상협회 초청으로 파리에서 첫 컬렉션을 연 것이다. 당시 언론은 ‘선경(仙境)의 마술’(르 피가로)이라고 극찬하는 등 호평을 받았다. 2년 뒤인 1968년에는 여세를 몰아 미국 뉴욕에서 패션쇼를 여는 등 세계 무대에도 일찍 진출했다.

이후 그는 국내뿐만 아니라 매년 각국의 대표적 명소에서 패션쇼를 열었고, 처음으로 이집트 피라미드 앞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공식 초청받아 바르셀로나에서 패션쇼를 개최했다.

패션에 대한 열정과 공로를 인정받아 1997년 패션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훈장을 받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서도 훈장을 받았다. 1999년 그의 패션쇼가 열렸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1월 6일을 ‘앙드레 김의 날’을 선포했고 2005년에는 한국복식학회가 주는 최고디자이너상을 받았다.

한때 배우 꿈 꾸기도

앙드레 김은 한 때 배우를 꿈꾸기도 했다. 영화 ‘비오는 날의 오후 3시’라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앙드레 김은 연예계와도 인연이 깊었다. 그의 패션쇼는 당대의 스타들이 한번쯤은 거쳐 갔을 정도로 ‘스타 등용문’으로 유명세를 탔다. 전문 모델뿐만 아니라 국내의 내로라하는 톱스타들이 등장해 그의 패션쇼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상승했다. ‘앙드레 김 무대에 서야 최고의 스타로 인정 받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연예인 지망생들과 현역 연예인들에게 앙드레 김 패션쇼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김희선, 장동건, 배용준, 원빈, 심은하, 송혜교, 권상우, 소지섭 등 숱한 별들이 그의 무대를 활보했다. 최은희를 비롯해 김지미, 윤정희, 장미희, 황신혜 등도 앙드레 김의 무대를 수놓았다. 김태희·송승헌, 최지우·이진욱, 한예슬·재희, 황정음·김용준, 설리·최시원, 장서희·배수빈 등은 앙드레 김 무대의 상징인 남녀가 이마를 맞대는 피날레를 장식한 얼굴들이다.

앙드레 김은 지난 5월 2일 장동건·고소영의 결혼식에 참석,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국내 뿐만이 아니었다. 세계적인 팝스타 마이클 잭슨과 배우 나스타샤 킨스키, 브룩 실즈도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옷을 착용해 그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앙드레 김은 생의 말년에는 패션뿐만 아니라 보석과 도자기 등 공예분야와 속옷, 안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앙드레 김’ 브랜드를 잇따라 런칭해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앙드레 김의 속옷 브랜드는 유명 홈쇼핑 채널에도 등장하며 보다 친근하게 소비자들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앙드레 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999년 불거진 정치권 ‘옷 로비’ 사건 때문이다. 유력인사들의 로비용 의상 구입 장소였다는 이유로 국회 청문회에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하며 ‘김봉남’이란 본명이 세상에 알려지며 희화화의 소재로 등장하게 됐다. 개그프로그램의 소재로 단골로 등장하는 등 세간에 그의 이름이 웃음거리가 된 것에 대해 “억울하고 불쾌한 일이었다”고 토로한 적도 있었다. 패션에 대한 열정 하나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고인은 1982년 당시 18개월 된 아들 중도씨를 입양했으며, 2005년에는 쌍둥이 손자를 얻어 할아버지가 됐다.

각계 추모 물결 이어져

앙드레 김에 대한 각계각층의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장례 이틀째인 지난 8월 13일 슈퍼주니어의 최시원이 고인의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이밖에도 8월 12일 원빈이 애통한 표정으로 가장 먼저 고인을 조문했으며 전도연, 김희선 등 그의 무대에 섰던 톱스타 여배우들은 갑작스런 비보에 오열했다. 또 심지호, 유인촌 장관, 노홍철, 유재석 등이 빈소를 찾았다. 빈소를 찾지 못한 이들은 조화로 아픔을 달랬다. 빈소에는 이명박 대통령, 손범수·진향희 부부, 패션업계 및 매거진 관계자들의 조화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도 고인의 장례식장에 조전을 보내는 등 조의를 표했다.

이 대통령은 조전에서 “앙드레 김 선생은 세계 수준의 패션 작품을 통해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면서 “지속적인 기부와 봉사로 많은 국민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앙드레 김 선생의 영면을 빌며 유가족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드린다”고 애도를 표했다. 이 대통령의 조전은 오전 진동섭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 병원을 찾아 조문하면서 대신 전달했다.

고 앙드레 김의 외동 아들 김중도씨는 브리핑을 통해 “지난 2005년 대장암, 담석 척출 관련 수술을 받았고 그간 항암치료를 해왔다”고 밝혔다.

앞서 앙드레 김은 지난 7월 22일 건강상태가 급격히 악화돼 서울대학병원 내과계 중환자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패션계 거장 앙드레 김은 몇 해 전부터 고령으로 인한 건강 악화설이 여러 차례 나돈바 있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16일이다. 장지는 천안공원묘원으로 확정됐다.

[전성무 기자]lennon@dailypot.co.kr

#앙드레 김이 걸어온 인생 >>

▲1935년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
(현 서울시 은평구 편입) 출생. 본명 김봉남
▲1962년 국제복장학원 졸업. 소공동에 앙드레김
의상실 설립. 국내 첫 남성 패션디자이너 데뷔
▲ 1966년 국내 디자인 첫 프랑스 파리 의상발표회
▲ 1981년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 지명디자이너
▲ 1982년 이탈리아 대통령 문화공로훈장
▲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수복
디자인 및 서울 올림픽 기념 패션쇼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막 패션쇼
▲ 1996년 이집트 카이로 패션쇼, 한국 유니세프
자선 의상발표회
▲ 1995년 2002년 월드컵 유치 위원회 자선 패션쇼
▲ 1997년 문화훈장 화관장(5등급)
▲ 1998년 제3회 엘르 패션인 대상
▲ 199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앙드레김의 날’ 선포
▲ 2000년 프랑스 예술문학훈장. 시드니 올림픽
개막 패션쇼
▲ 2001년 한국기능올림픽조직위원회 명예친선대사
▲ 2002년 세계평화아동축제 아동평화대사
▲ 2003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
미국 샌프란시스코 두 번째 ‘앙드레 김의 날’ 선포
▲ 2005년 제39회 납세의 날 국무총리표창,
제1회 한국복식학회상
▲ 2004년 국제백신연구소(IVI) 홍보대사
▲ 2006년 한국관광공사 관광명예홍보대사
▲ 2007년 여수엑스포·광주디자인비엔날레
홍보대사
▲ 2008년 문화훈장 보관장(3등급)
▲ 2010년 7월21일 폐렴증세로 서울대병원 입원
▲ 2010년 8월12일 건강악화로 사망

##남들과 달랐던 ‘하얀천사’ 앙드레 김

앙드레 김은 패션 디자이너로서 일반에게 누구보다 많이 알려졌던 인물이다. 그의 독특한 외모와 옷차림, 특유의 언행에서 나오는 ‘악센트’는 항상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항상 흰색만 고집하는 옷차림과 까맣게 이마 윗부분까지 칠한 헤어스타일, 진한 메이크업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앙드레김이 유명해진 결정적인 계기는 1999년 ‘옷로비’ 청문회였다. 당시 검찰총장 부인 등 유력인사의 부인들이 옷을 구입한 매장으로 지목돼 국회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했다. 이 때 그가 남긴 말은 두고두고 희화화 되면서 국민에게 친근한 존재가 됐다. 당시 앙드레 김은 “본명을 말하라”는 국회의원의 요구에 “김봉남입니다”라고 밝혔다. 이후 TV 예능 프로그램들이 두고두고 이 장면을 웃음의 소재로 활용하면서 앙드레김은 패션거장 겸 인기 연예인처럼 돼버렸다. “판타스틱해요”, “엘레강스하고”, “엄~뷰티풀” 등 특유의 억양과 비음이 실린 말들이 방송을 타고 또 개그맨들이 성대모사를 하면서 대중은 앙드레 김을 보면 일단 웃음부터 짓게 됐다.

앙드레김은 지난 ‘옷로비’ 청문회에 대해서는 불쾌감을 드러낸바 있지만 대중들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섰다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2007년 10월 연예 프로그램 출연해 “순간 민망스럽기도 했는데 참 놀라운 현상이 나타나곤 한다”며 “텔레비전에서는 나를 희화화했는데 이미지에 마이너스가 전혀 안 됐다”고 말했다.

앙드레김은 독특한 개성을 특유의 순수함과 친화력으로 대중이 거부감 없이 수용하게 만들었다. 고인은 이렇게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전성무 기자 bukethead@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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