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불러 온 촛불집회와 조국 사태 등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정’하지 못한 기득권 세력의 권력놀음에 대한 국민의 엄중한 심판, 경고라며 지금의 시대정신은 ‘공정’이라고 규정했다. ‘2019 시민희망지수'를 조사 발표한 희망제작소 "국회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가 실망을 넘어 '포기'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며 "그러나 시민 80.3%가 내년 총선에 투표하겠다고 답해 20대 국회에 대한 심판론이 크게 대두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이 때문에 각 당 공천관리위원회는 이 당 저 당 할 것 없이 출범 초 시대정신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공정 공천’을 약속했다. 그러나 각 당의 공천 결과를 보면 각 당의 공천관리위원회가 과연 출범 당시 한 약속을 지키고 있는지 의심이 간다. 

‘현역 컷오프’ ‘청년 공천’ ‘전략 공천’ ‘험지 출마’ 등 그럴싸한 말 몇 마디로 국민을 현혹하고 국민의 대표 선택권 자체를, 국민 주권을 강탈하는 구악, 반민주, 불공정 공천을 이번 총선에서도 뻔뻔하게 자행하고 있다.    

공정은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최순실이나 조국 사태 때 왜 수많은 국민들이 분노했는가. 국정농단과 개인적인 여러 범죄 행각 보다도 국민들은 최순실의 딸이, 조국의 자식들이 아빠 찬스, 엄마 찬스를 이용해 ‘보통 사람’의 자녀 입학 기회를 뺏어 특혜 입학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5일 현재 108지역구 중 73개 지역구를, 미래통합당은 81개 지역구 중 45개를 전략·단수 공천했다. 절반 넘게 중앙당이 공천관리위원회의 후보 심사를 명분으로 지역 유권자 의사와는 무관하게 공천한 것이다. 경선한 지역구 후보조차, 컷오프(cut off)라는 요상한 무기로 멋대로 칼질을 해 유권자의 후보 선택권을 박탈한 것은 마찬가지다. 

당 정체성에 맞지 않는, 비효율적이고 무분별한 경선을, 부적합한 후보를 사전에 걸러내어 당원과 유권자들의 선택을 돕겠다는 그럴싸한 이유를 내세우지만 그 본질은 지역유권자, 국민의 후보, 국회의원 선택권을 강탈 행위이다. 도둑질한 것이다.  

종종 실망스런 정치인들의 행태를 꼬집다가 ‘국민 수준이 문제야’라는 말을 듣곤 한다. 프랑스 보수 정치학자 조제프 드 메스트르가 “민주주의에서 국민들은 그들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가진다”라고 했다. 선진국 국민은 당연히 누리는 후보선택권을 못 갖는 이유는 국민이 그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인가.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 지역 대표 하나 고를 수 없는 수준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화제가 된 사람을 반나절이면 신상을 털어내는 인터넷강국 대한민국 국민이다. 

이유는 뭘까. 간단하다. 정당과 진영에 관계없이 소위 정치 실세,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내놓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국민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권력을 탈취하여 권력유지 및 확대재생산에 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소위 정치지도자들은 국민에게 정치 열정 페이(임금도 제대로 안 주면서 순수한 젊은이들의 열정을 이용해 착취)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낙하산 후보’, 사회활동도 제대로 못해 본 ‘젊은 후보’, 자기 선거구 뺏기고 쫓겨 온 ‘퇴물 후보’, 10년 지역 다져 온 후보 제치고 사과조차 없는 ‘파렴치 후보’, 당과 지역 기여 없이  ‘사’자 벼슬뿐인 ‘금수저 후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측근 후보’ 등등. 아 또 있다. 최근 신생 정당이나 단체로 몽니 부려 공천 후려친 ‘알박기 후보’와 공천위원장이나 당 실세 마음 뺏은 ‘스타 후보’.

이런 후보의 지역민들에게 선거란 ‘묻지마 투표’다. 중식당에서 ‘메뉴’ 고르는데 갑자기 식당 주인이 ‘자장면밖에 없어요. 자장 드세요’ 강제 주문받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횡포다. 반민주 불공정행위다.

선거법에 따르면 각 정당은 후보자를 ‘당헌. 당규’라는 전제 조항이 있지만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선출해야 한다. 지금 각 정당 당헌.당규에 있는 ‘민주적 절차’란 공천관리위원회를 통한 공천자 결정을 의미한다. 즉 모든 정당의 민주적 절차에는 당 지도부와 그들로부터 선택받은 교수와 법조인을 비롯한 몇몇 지명도 있는 자들이 벌이는 5분짜리 심사만 있을 뿐이다. 공관위원 십여 명이 4천여만 명의 유권자 선택을 대신하는 것을 결코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직접 교묘한 술책으로 국민의 후보선택권을 가로채간 공천 제도를 바로잡는 유일한 방법은 형식적이라도 ‘경선’으로 선출된 후보 외에 ‘전략.낙하산’ 공천자를 낙선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전략.낙하산 공천자를 낙선시켜 지역 유권자들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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