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은 침대에 누웠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인테이크에 침입하려다 익사한 사람, 그가 갖고 있던 지도와 암호 같은 그림과 글자, 아나톨리, 옛 애인 배성민의 전화.
갑자기 모든 게 뒤죽박죽 얽히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오후. 수원은 창문 밖으로 희뿌연 산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울산 발 서울행 비행기 안이었다. 서울 삼성동의 콘티넨탈 호텔로 가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한국형 대용량 원자력발전소 개발에 대한 설명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호텔 컨벤션홀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대부분 알제리 상공인들이었고, 국내 참석자들은 전부 소장이나 본부장급 이상이었다. 한수원만 예외였다. 수원은 연구원이 아니라 통역원으로서 참석했다. 2차 대전 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사람들이 프랑스어를 쓰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능숙히 구사하는 수원이 멤버로 배정되었다.

“갑자기 홀이 환해진다 했더니 우리 한 박사님이 오셨네.”
리셉션 테이블 근처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던 강병욱 정책처장이 반갑게 손을 들었다. 키가 작고 날렵한 인상을 가진 강 처장은 영어 실력과 사교 매너가 뛰어나 회사 내 국제 관계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한국수력원자력에 수원을 스카웃한 사람이기도 했다. 수원은 뉴욕에서 열린 원자력 발전 세미나에서 강 처장을 처음 만났다.

“안녕하셨어요? 바닷가에 내려가 있느라고 자주 뵙지 못했네요.”
수원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아, 오늘 배성민 박사도 온다고 했는데 끝나고 한잔 할까?”
강병욱 처장이 사방을 휘둘러보며 말했다.
“네?”

수원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커졌다. 배성민이라는 말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생각에 수원은 얼굴이 저절로 붉어졌다.
“몰랐나 보군. 미국 컨버스천 엔지니어링에 적을 두고 지금은 코펙에 파견 나와 우리 회사 일을 돕고 있어.”

코펙(KOPEC)은 원자력발전소의 기술 및 설계 업체의 약칭이다.
강 처장은 배성민과 한수원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강 처장이 협력 업체인 미국 웨스팅하우스에 장기 출장 가 있을 때 두 사람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었다. 배성민은 웨스팅하우스의 연구원이었고, 한수원은 샌프란시스코 연구소에 있었다. 먼 거리에서도 두 사람이 자주 만나는 것을 유심히 보았었다. 이후 둘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드디어 공식 행사가 시작되었다. 사회자가 마이크 앞에 섰다. 수원은 헤드 테이블에 배치되었다. 찬찬히 둘러보았지만 배성민은 보이지 않았다.
사회자의 참석자 소개가 끝나자 한국수력원자력 김종호 사장의 인사말이 시작되었다. 수원도 옆에 나란히 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전문 통역사는 아니었지만, 원자력 발전 전문 용어를 통역하기에는 적격이었다. 

“여러분, 골프 좋아하시죠?”
김 사장의 느닷없는 첫마디에 수원은 당황했다. 혹시 잘못 들은 것 아닌가 하고 김 사장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김 사장이 빙그레 웃으며 두 팔로 골프 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제야 수원은 재빨리 통역을 했다.
“물론이죠.”

알제리 회장이 크게 웃으며 프랑스어로 대꾸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여타 종목에 비해 공이 매우 작지 않습니까?”
김 사장이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작은 골프 공 만한 재료로 CO2 배출 한 점 없이 석유 9백 드럼에 맞먹는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게 뭔지 아십니까?”

그제야 모두 골프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알고 소리 내어 웃었다.
“네, 우리 모두 답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원자력이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전 세계 원자력발전소 플랜트 규모는 2030년까지 신규 건설될 원자로가 총 3백 기로, 돈으로 환산하면 8백조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김 사장은 수원의 통역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현재 우리 회사는 알제리를 비롯해 요르단, 모로코, 터키, 루마니아, 아랍 국가들,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 원전 플랜트 수출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알제리 상공인들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지금 150만 킬로와트 급의 대형 토종 원전 개발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미 ‘APR 1400’, ‘APR+’ 같은 친환경적 한국형 원전 개발에 성공했지요.”

김 사장의 말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루마니아와는 캔두(CANDO), 즉 중수로 방식 원전 건설 계약도 체결했습니다. 이 기술도 한국수력원자력만이 가진 자랑입니다.”
김 사장은 자신에 찬 어조로 연설을 계속했다.

“우리는 2030년까지 국내 발전의 59퍼센트를 원전으로 대체할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수출로 18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지만, 앞으로는 훨씬 많아질 것입니다. 한국은 30년 전 미국에서 원전 기술을 전수 받았지만 지금은 더욱 발전된 기술을 역수출하고 있습니다. 가만 있자, 두산의 김 부사장님 어디 계십니까? 그 이야기 좀 하시지요”

김 사장이 갑자기 협력업체 전문가를 불러 세웠다.
헤드 테이블 쪽에서 두산중공업의 김태우 부사장이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우리 회사는 이번에 미국 팔로버디 2호기의 헤드와 제어봉 수출 계약을 했습니다. 순수한 국내 기술로 개발한 제품입니다. 뭐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김 부사장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겸손의 말씀이지요. 헤드와 제어봉은 간단한 기술이 아닙니다. 수백만의 희생자를 낸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이 헤드의 잘못으로 일어났다는 건 다 알고 계실 겁니다. 또한 제어봉 구동 장치의 부식을 방지하는 획기적 기술이 국내에서 개발되었다는 것도 말씀드립니다. 한국 기술이 세계를 놀라게 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김 사장의 연설은 큰 박수로 마무리되었다.  [계속]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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