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주영준이 조심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 얼마든지.”
“한 차장님은 왜 이곳으로 오신 겁니까?”
“네?”

수원은 질문의 뜻을 몰라 되물었다.
“한 차장님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이시잖습니까? 그런데 이곳에 와 있는 게 궁금해서 말입니다. 뭔가 더 큰 목적이라도 있으십니까?”
“하하하.”

주영준은 질문을 하면서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입술이 실룩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수원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속내를 전혀 숨기지 못하는 순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폭발 차량의 앞좌석에 타기로 돼 있었다는 말에 운전사와 공모라도 한 것으로 추리한 듯싶었다.
“폐연료봉 빼내 핵폭탄 만들려고 왔죠.”
“예에?”

영준은 입을 딱 벌리고는 다물지 못했다.
“놀리지 마십시오.”
한참 후에야 농담인 줄 안 영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서도 질문에 답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는 수원에 대해 미심쩍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해변 변사체 사건 수사는 진전이 있나요?”

수원은 화제를 바꾸었다.
“본부에서 취수구의 장애물 시설을 다시 점검했습니다. 스톱 로그와 스크린 바,  회전 스크린 등 모두 매일 두 번 이상 점검하기로 했습니다. 담배꽁초 하나도 다 적발될 겁니다.”

“그랬군요. 그것보다 그 다이버의 신상에 대해서 나온 건 없나요?”
“낚시용품 소매상을 하는 사람이랍니다. 이름은 장안토니오고요. 해군에 근무했답니다. 나이는 30대 후반, 허황한 꿈에 젖어 일주일에 로또 복권을 10만 원어치씩이나 사는 사람이랍니다.”

“이름이 안토니오라고요? 한국 사람 아닌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주민등록상에도 그렇게 돼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왜 침투하려 했을까요?”
수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양경찰대가 더 조사를 하고 있다니까 곧 밝혀낼 겁니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고요?”
“그 시각에 제한구역에 나타난 배는 없었답니다. 보안부서 사람들의 추측으로는 누군가의 심부름꾼일 거라고 합니다.”

“사실 그날 바다 먼 쪽에 요트가 떠 있는 것을 봤어요.”
“그랬습니까? 보고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던데.”
“분명 봤어요. 너무 멀어서 확신할 순 없지만 선체의 흰색과 푸른색이 기억나요. 해양경찰선이 나타나자 곧 사라지더군요.”
“그랬군요.”

수원의 말에 영준은 입술을 꾹 다물며 생각에 잠겼다.
수원은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았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대한항공 902편 강제 착륙 사건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미사일을 쏜 소련군 조종사의 이름 아나톨리. 해변 변사체의 지도에서 나온 단어 아나톨리. 둘 사이에 뭔가 연관성이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라’ 사이트의 인터넷 주소는 ‘pandora.co.nz’이었다. 국가명의 ‘nz’은 뉴질랜드의 약자였다.

파리에서 만들어진 판도라 모임은 핵에 관심을 가진 각국 유학생이 중심이었다. 처음에는 인터넷 사이트가 없었으나 뉴질랜드에서 온 데이비드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 사이트를 만들어 뉴질랜드 도메인을 쓰게 되었다.
수원은 ‘Anatoly’ 게시판을 열어 보았다. 무르만스크 대한항공 여객기 강제 착륙 사건과 관련된 정보만 모아 두는 방이었다.

수원은 게시판에 떠 있는 여러 가지 정보를 대충 훑어보며 스크롤바를 내렸다.
- 파리, 김형욱, 무르만스크.

눈에 띄는 제목이었다. 수원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마우스를 클릭했다.
- 무르만스크 대한항공 902편 강제 착륙사건에는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이 개입돼 있다.

첫 문장부터 흥미로웠다. 수원은 다음 문장을 읽기 전에 여러 포털 사이트에서 김형욱에 대해 알아보았다.
김형욱.

1925년 황해도 신천 출신. 육사 8기. 1963년 제4대 중앙정보부장. 최고회의 위원. 국회의원. 박정희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는 심복이었으나 배신, 1973년 미국으로 망명해 여러 차례 박정희에 대해 공격성 발언을 했다. 이후 어느 날 파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김형욱의 행방불명에 대해서 수많은 설이 나돌았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내용은 이것이었다. 

배신자를 응징하라는 박정희의 명령이 떨어지자 정보기관에서는 ‘파리 암살 사건’을 주도한다. 즉, 한국의 유명 여배우 C와 Y에게 미국에 있는 김형욱을 파리로 불러내도록 한다. 파리에 대기하고 있던 요원들이 김형욱을 마취시켜 파리 교외로 끌고 간다. 거기서 암살한 다음 닭 사료 분쇄기에 넣어 사료와 함께 갈아버린다.

또 하나는 김형욱을 청와대 지하실로 끌고 가 박정희가 직접 사살했다는 설이었다. 이 밖에, 파리로 유인한 김형욱을 1979년 10월7일 오후 7시 르그랑 세르콜 카지노에서 정체불명의 청년 둘이 끌고 간 뒤 소식이 끊겼다는 구체적 상황이 담긴 설도 있었다.

수원은 다시 판도라 사이트의 아나톨리 게시판으로 돌아왔다.

- 열강들의 이권 다툼, 김형욱, 박정희. 이 삼각관계의 수수께끼를 풀면 무르만스크의 진실을 알게 된다.

글을 올린 사람은 자신을 1978년 덴마크 주재 소련 대리대사의 딸이라고 밝혔다. 사건 직후 자신의 아버지는 기자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많이 제공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 그날 항로를 알려 주는 로렌스테이션 전파는 항공기가 통과하고 있던 지점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송되고 있었다. 바로 그린랜드와 아이슬랜드의 기지였다.

그때 이들 기지는 KGB가 장악하고 있었다. KGB는 고의적으로 대한 항공기를 잘못된 방향으로 유인해 소련 영토를 침범하게 했던 것이다. [계속]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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