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로 넘어간 정황 없다지만…기강 해이에 안보 ‘흔들’

다연장로켓포 천무 [뉴시스]
다연장로켓포 천무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방과 안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 전쟁의 참화로 온 국토가 잿더미가 된지 100년이 채 되지 않았고, 여전히 북쪽에서는 가장 위협적인 적이 호시탐탐 적화통일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건강 이상설 등으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더욱 굳건한 대비태세를 갖춰야 할 군에서 군사 기밀 유출 사건이 벌어졌다. 유출된 정보는 무려 68만 건. 이 자료들이 북한이나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면 대한민국 안보는 중대한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 중형 가능

지난달 26일 국가정보원과 경찰에 따르면 국방과학연구소(ADD) 연구원 A씨가 퇴직하며 68만 건의 기밀 연구 자료를 유출한 정황이 드러났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우리 군의 국산 무기 개발을 주관하는 곳이다. 지난 1970년 무기체계 연구와 개발 등을 위해 창설된 후 약 50년 간 우리 군이 사용하는 K-9 자주포 등 전차, 다연장로켓포 천무, 대전차미사일 현궁, 군용기, 나아가서는 최첨단 전자기기까지 관련 기술을 개발해 왔다. 해당 연구원은 퇴직 1년 전부터 지난해 9월 국방과학연구소 근무를 마칠 때까지 USB에 기밀 연구 자료를 담아 외부로 가지고 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이 연구원은 현직 근무 당시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고위 간부를 지낸 경력자다. 현재는 서울의 한 사립대에서 연구소 책임자로 재직하고 있다. 지난해 말 이와 관련한 첩보를 입수한 국정원은 경찰과 함께 은밀하게 내사를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A씨가 빼낸 기밀 자료는 대부분 인공지능(AI)이나 드론, 로봇 같은 미래 첨단 전략 무기와 관련된 것들로 전해졌다. 국내는 물론, 해외 방위산업체들도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 만한 정보들이 적지 않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다만 A씨는 수사가 시작되자 ‘돈을 벌기 위해 기밀 연구 자료를 빼간 것이 아니다’, ‘연구할 때 참고하기 위해 보관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정부 역시 아직 유출된 연구 자료가 해외로 넘어간 정황은 없다고 전했다.

연구 기밀 유출이 관행?
중동 국가 등 해외에 넘긴다는 첩보도

문제는 기밀이 유출된 정황이 A씨 사례 외에도 있다는 점이다. 군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수년간 국방과학연구소 퇴직 연구원들이 적게는 수만 건에서 많게는 수십만 건에 달하는 무기 관련 기밀을 허가 없이 유출한 정황이 포착됐다. 관련된 연구원은 6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이 국내 방산 기업에 취업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일부는 조사에서 “퇴직 이후 취업을 위해 기술을 빼내가는 관행이 있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정부 관계자는 “국방과학연구소 일부 연구원들이 퇴직하며 기밀 자료를 밖으로 빼내 중동 국가 등 해외에 넘긴다는 첩보가 있다”며 “이를 대가로 스카웃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군은 “정확히 어떤 기술이 어디로 어떻게, 얼마나 빠져나갔는지 파악하는 중”이라면서 “군사 기술과 기밀이 사기업 등에 유출돼 사용됐다면 심각한 문제”라고 설명했다. 논란이 커지자 국방과학연구소를 산하로 둔 방위사업청의 왕정홍 청장은 지난달 29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직접 출석해 사과했다. 왕 청장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일반 사기업체 영업기밀도 아니고, 국방에 관한 중요한 기밀을 다루는 국가기관에서 업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데 대해 정부기관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송구하다”면서 “작년에 통과된 법을 근거로 관련 기관들을 자체 실태조사를 했다”고 전했다. 이어 “작년 연말에 실태조사를 하다보니까 전체적으로 관리가 허술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른 시간 내에 보완토록 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번 건이 밝혀졌다”며 “그 내용을 파악해서 국정원, 안보지원사 등 관련기관에 수사를 의뢰했고 수사 중”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방위사업청이 수사 결과에 따라 강력한 후속 조치를 취하겠다고 천명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지난달 27일 방위사업청 관계자는 국방부 정례브리핑에서 “국방과학연구소 사안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지금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현재 진행 중인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수사 후에 그 결과에 따라서 후속 조치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어 “국방과학연구소의 문서관리체계나 제도적인 보완 사항을 방위사업청에서 확인하고 조치를 강력하게 취하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재임 기간 중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왕 청장의 답변이 거짓으로 드러나며 방위사업청과 왕 청장이 책임 회피에 급급하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기밀 유출 처벌 수위는?
文 대통령 “신속 수사” 지시

수사 대상에 오른 연구원들은 기밀을 판매하지 않았더라도 처벌을 받을 확률이 높다. 현행 방위산업기술 보호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기밀 판매로 인한 사적 이익 취득 여부와는 무관하게 해당 기술을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하기만 해도 처벌하도록 규정돼 있다. 연구원들이 국방과학연구소의 허가나 승인 없이 기밀을 빼내 개인 저장매체에 복사한 것이기 때문에 부정 취득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A씨 등이 취득의 정당함을 재판부에 입증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형이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전과 여부와는 무관하게 실형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특히 연구원들이 기밀을 해외에 유출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 처벌 수위는 2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억원 이하의 벌금으로 2배 늘어난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달 29일 정경두 국방부장관은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VIP(대통령)께서도 신속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합동기관에서 전면적으로 엄중하게 조사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정 장관은 “(유출된 기밀이) 68만 여 건이라고 하는데, 비밀자료는 4000여 건”이라고 바로 잡으며 “일반자료라도 한 건이라도 유출하는 것은 아주 잘못”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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