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태극기와 일장기 [뉴시스]
태극기와 일장기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권익현 민정당 사무총장이 비밀리에 도쿄에 들어가서 일본 정치지도자들을 다 만났다”
“이때 처음 세지마 류조가 등장한다”

▲ 그렇게 제11차 정기각료회의가 10월에 열리게 되는데 역시 계속 양측의 주장이 맞선다. 일본은 단년식, 소위 쌓아올리기 식으로 가서 ODA 13억 달러라는, 처음으로 구체적인 액수가 나온다. 20억 달러는 스노베가 차 안에서 한 이야기고, 이건 공식석상에서의 이야기다. ODA 13억 달러, 수은자금 27억 달러 해서 도합 40억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한다. 한국은 “아니다. ODA 하한선은 40억 달러고 상한선은 60억 달러다”라고 했다. 그런데 아마코스트 아태차관보 대리의 발언이 ‘산케이 신문’에 나고, 동시에 ‘지지통신’의 오카자키 후미오 기자의 기사가 실린다. “한국이 주장하는 안보경협론의 발상은 어디에 있었는가, 60억 달러를 산정한 그 근거를 본다면 미국의 그림자가 그 뒤에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소위 말하는 일본의 안보 무임승차론, 특히 5월의 미·일 정상회담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는데 그때 스즈키 수상이 대한경협에 대해선 전향적인 발언을 한 점, 한·일 정기각료회의 때 일본 외무성 수뇌가 한국은 미국이 말하면 일본이 수용할 것으로 안다는 발언 등등으로 봐서 미국이 뒤에 있다는 식의 기사가 나온다.
근데 이쯤에서 일본은 일본 입장에 대해서 한국 대통령을 설득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일본의 ODA 운영 방식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유력한 인사들을 일본에 초청한다. 우리나라 정치가들도 이때 방일 초청을 했다. 동시에 일본의 경제전문가들, 가나모리 히사오라고 일본경제문제연구소 소장, 장기신용은행의 다케우치 히로시 조사부장을 한국에 보내서 한국의 경제계 인사들에게 일본의 방식을 설명했다. 그런데 이때 양측 외무부장관 경질설이 돌았다. 교섭 책임자를 교체할 필요성이 있다. 그래서 일본은 국회 폐회 후 보통 10월에 개각하지 않느냐. 10월쯤, 11월 개각 시에 소노다 외상이 교체될 것이고 그 후임으로 아베 신타로나 사쿠라우치 요시오가 들어올 예정이다. 그러니까 한국도 강경론자인 노신영 외무부 장관을 바꾸라는 이야기를 언론에 띄운다.
그 후 제2차 스즈키 내각이 발족하는데 개각을 하면서 사쿠라우치 요시오가 외무대신이 된다. 개각 기자회견에서 스즈키 수상은 대한 경협에 대해서 상당히 응하겠다고 하는 유연한 자세를 표명한다. 구체적으로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생안정은 아세아의 안정에 기여한다.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양국관계는 국민적 기반에서 상호 이해와 신뢰관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소위 일본 식으로 이야기하면 전향적인 발언을 한다. 그다음에 “경협은 한국 경제·사회의 발전, 민생 향상에 기여할 것이므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협력하겠다”고 했다.
그 후에 사쿠라우치 외상이 “우선 1981년도 분의 ODA를 협의하자,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5개년 분을 내다볼 수 있는 거 아니냐. 쌓아올리기 식으로 하되, 1981년 협의부터 먼저 하자”는 전술로 나온다. 이에 대해 한국은 “안 된다. 총액부터 먼저 제시해라. 외상회담에서는 총액을 제시하고, 실무자 회담에서 프로젝트를 논의하자”는 절충안을 낸다. 그러면서 “일본에게 안보경협이 그렇게 문제가 된다고 하면, 안보는 명분에서 떼도 좋다”는 뉘앙스를 보이고, 동시에 “외상회담이나 또는 차관회담에서 총액 논의를 할 텐데, 외상이나 총리가 와라”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때 스노베 차관이 사쿠라우치 외상의 이야기를 받은 다음에 “외상회담 전에 고위급 실무자회담을 개최해 1981년도 분을 협의하고, 5개년계획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것으로 하자”고 했다. 이때쯤은 우리가 우리 5개년계획하고 결부를 시켰다. 그래서 “그래야만 일본의 관계 각성이 설득되겠다”는 스노베 제안에 대해서 한국은 계속 “총액 결정이 선행돼야 한다. 외상회담을 위한 고위 예비접촉은 좋다. 받겠다. 고위 예비접촉을 위해서 방한을 환영한다. 그리고 1981년도 분은 60억 달러 속에 포함되는 건 좋은데 분리해서 이야기하는 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스노베 차관이 분리 검토하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속임수는 아니다”라는 말까지 붙이는 거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분리 토의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렇게 해서 고위급 예비접촉이 합의되고, 1982년 1월 10일에서부터 16일 도쿄에서 갖기로 합의를 했다. 이러한 내용은 공식채널에서 오간 이야기다. 그런데 이때 정치가들 사이에서 “정치적인 레벨에서 비공식 절충을 하는 채널을 만들자. 일이 어려우니까 공식적으로 넥타이 매고 이야기해봐야 서로 한번 이야기한 것들은 거둬들이기도 어렵고 교섭이 안 된다. 그러니까 좀 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실제로 속내를 들여다보는 이야기들을 할 필요가 있다”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 권익현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이 대통령의 지시로 홍콩을 경유해서 비밀리에 도쿄에 들어가서 일본의 주요한 정치지도자들을 다 만났다.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관방장관, 나카소네 야스히로 행정관리청 장관, 아베 신타로 통산대신, 니카이도 스스무 자민당 간사장, 대장대신을 지냈던 하야시 요시로, 지금 하야시 요시마사의 아버지다. 다나카 가쿠에이, 후쿠다 다케오, 야마구치의 다나카 다쓰오 한일친선협회장을 쭉 만난다. 그래서 아베 신타로 대신의 제안에 따라서 우리 측이 비밀접촉 특사로 권익현씨를 지명한다. 일본 측에서는 맨 처음에는 스노베를 거론하다가, 곧 세지마 류조 이야기를 꺼낸다. 이때 처음 세지마가 등장한다.

- 세지마 류조 말씀이신가.

▲ 세지마 류조는 당시 일본종합무역상사 이토추의 고문이었다. 이토추 전 회장이다. 그 사람이 이면채널의 특사로서 일본 측에서 지명이 됐다. 한편, 공식채널에서 합의됐던 것처럼 외상회담에 앞서 고위 예비회담 절충 회의를 도쿄에서 하기로 했는데, 실제로는 1982년 1월 14일 서울에서 고위급 실무접촉을 한다. 이때 비로소 처음으로 우리의 총액 제시 방식, 일본의 단년 프로젝트베이스 적상 방식으로 원칙론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구체적인 실무협의가 시작이 된다. 그래서 이때 처음으로 한국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른 12개 프로젝트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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