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5월17일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의 “5.18 기념식 폄하”가 “참으로 분노 스러웠다”며 증오심을 토해냈다. 2017년 4월30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통령선거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은 “극우 보수세력을 완전히 궤멸시켜야 한다”고 했다.

두 사람은 보수정치 경쟁자를 ‘분노’와 ‘궤멸’의 적으로 간주한다. 진보좌파나 보수우파나 서로 상대편을 ‘분노’와 ‘궤멸’의 대상으로 적대시하는 한 자유민주 정치의 기본인 ‘타협과 상생’은 기대할 수 없다. 오직 전직 대통령을 잡아들이는 보복의 악순환만 되풀이될 뿐이다.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5월23일 “대통령마다 예외 없이 불행해지는 대통령의 비극이 이제는 끝나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예외 없는 대통령의 비극”을 끝내기 위해서 진보는 보수를 보수는 진보를 서로 ‘궤멸’시켜야 할 적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대통령들은 재직 시 제왕처럼 군림하다가도 권력의 끈만 떨어지면 주변 실세들과 함께 줄줄이 오랏줄에 묶이는 게 통과의례처럼 되었다. 그래서 현직 대통령이나 실세들을 볼 때마다 저 사람들도 권좌에서 물러나면 죄수복에 쇠고랑 차고 법정으로 끌려가리라는 초라한 그림이 겹쳐 보이곤 한다.

조선조의 파당(派黨: Faction)인 동인·서인·북인·남인·소론·대론·소북·대북이 서로 능지처참하던 사화(士禍)를 떠올리게 한다. 파당은 공공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오직 권력획득에만 매몰된다.

한국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결정적 흠결은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우리 정당들의 정당정치 미숙이다. 정당은 공공이익 실현을 목표로 하고 권력 획득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결성체이다. 그러나 우리 정당들은 조선조의 파당에 지나지 않는다. 공공이익보다는 권력 획득만을 노린다. 조선조의 파당 유전자(DNA)를 타고난 듯싶다.

둘째 한국 정치권력 비극 이유로는 보수와 진보의 태생적 적대관계를 들 수 있다. 선진국들의 보수와 진보는 정책경쟁 대결로만 간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정책 경쟁 다는 “너를 완전히 궤멸시키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적대관계로 맞선다. 우리의 좌·우는 1945년 8.15 해방 때부터 서로 ‘궤멸’ 혈전을 벌였다.

1948년 친소좌익세력은 제주 4.3 폭동과 10월 여수·순천 군(軍)반란을 일으켰고 그에 대한 친미·우익의 무력진압은 호남 주민들의 보수우파에 대한 적개심을 폭발시켰다. 동시에 좌익에 의해 참살당한 주민들의 좌익증오 또한 하늘을 찌를 듯했다.

북한의 6.25 기습남침과 적치(赤治) 3개월간 좌익분자들에 의한 학살만행은 좌익혐오를 절정에 이르게 했다. 1980년 5월 신군부의 광주항쟁 진압은 호남 주민들에게 보수에 대한 분노를 더욱 끓어오르게 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이 적대감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정치적 지지기반 확충을 위해 의도적으로 선동 증폭시켜 왔다. 문재인의 보수 대통령들에 대한 ‘분노’표출과 이해찬의 보수 ‘궤멸’ 주장도 정치적 지지기반을 위한 적대감 선동의 일환이다. 문 대통령은 전직 두 대통령과 전 대법관을 감옥에 가두었다. 보수 구심점을 ‘궤멸’시켰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5월21일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겁내지 않아도 될 시간이 됐다”고 했다. 그러나 두 대통령에 대한 사면은 ‘사간’의 적절성 문제가 아니다.

한국 정치의 적대적 증오와 ‘궤멸’ 종식을 위해 요구된다. 좌·우 진영 간의 적대 관계가 사라지지 않는 한 ‘타협과 협치’는 결코 기대할 수 없고 조선시대 사화만 되풀이 된다. 좌·우 진영간의 적대관계 해소만이 “대통령마다 예외없이 불행해지는 비극”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자유민주의 기본인 ‘상생과 타협’의 정치로 자리 잡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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