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전두환 전 대통령 [뉴시스]
전두환 전 대통령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1983년 해외순방은 대부분 불발이 됐다”
“인도네시아·태국·싱가포르·필리핀은 공동성명에 찬성했는데 말레이시아는 달랐다”

- 1960년대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에 버금가는, 물밑에서 많은 사람들과 많은 안건이 동시에 토의됐던 것 같다.

▲ 이것이 국교정상화 이후에 커다란 위기를 불러왔다. 그때 양국관계가 굉장히 악화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동시에 일본에서도 반한, 혐한 분위기가 굉장히 높았다. 그러니 최근의 상황을 방불케 한다. 그러한 우여곡절을 겪고, 결국 40억 달러 차관이 합의가 됐다. 후일담으로서는 우리 정부가 18억5000만 달러의 ODA 자금은 다 썼다. 아시다시피 부산지하철이나 영산강 프로젝트 등 인프라에 많이 투자가 됐다. 그런데 이때 엔고현상이 일어나서 우리가 민간자금 21억5000만 달러를 가지고 있었지만 쓰지 못했다. 그래서 ODA 자금으로는 그때 착실히 사업들을 했다. 그래서 아까 언급했던 그 12개 프로젝트가 진행이 됐다.

- 정부 간 공식채널 외에 세지마라고 하는 비공식 라인의 역할이 컸다는 생각을 해본다. 단순한 의사전달의 역할을 지나서 외무성에서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안까지도 본인의 사안이라고 하면서 제시할 수 있었다는 것 역시 말이다.

▲ 양측에 다 똑같은 이점이 있었다. 우리는 대통령이 시종 총괄하다시피 해왔기 때문에 그렇지만, 일본 측에서는 여러 가지 관계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타결로 끌어오는 데 사적 라인이 작용을 많이 했다고 본다. 더군다나 세지마를 특사로 쓰자고 하는 이야기는 아베 통상대신이 내각에 들어가기 전에 정조회장 때부터 그 이니셔티브가 나오고, 그 라인이 가동돼서 기여를 했다. 그래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이렇게 공식라인에서의 협의에만 맡기지 말고 여러 가지 양국의 협상 기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이 교훈을 당시 경협차관 교섭에서 얻을 수 있다.

- 잘 알겠다. 세지마의 역할, 그리고 어떻게 보면 일본에서 흑막이라고 할 수 있는 정·경제계까지 다 통하는 인맥이 그 시기에 있었다는 자체가 한·일 양국에 자산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세지마 씨를 그 후에 한 번 오사카에서 봤다. 이희건 관서흥은회장이 시텐노지에서 마련한 오찬 자리에서 셋이 만나서 점심을 했는데, 세지마는 그때 당시만 해도 소위 카리스마가 있는 존재였고, 정계·재계 양쪽에 다 걸쳐서 폭넓게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그분이 한국과의 관계가 상당히 깊다고 이야기한다. 권익현 씨가 삼성에 갔을 때 이병철 회장이 세지마와 연결해줬다고 한 이야기를 들었다.

- 제3세계 외교 차원에서 1981년 6월에 있었던 전두환 대통령의 아세안 5개국 순방에 대해서 질문 드리겠다. 당시 동남아 지역 국가들과 경제협력을 다지고자 하는 우리 외교에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그에 관해 말씀 부탁드린다.

▲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중에 총 6차례에 걸쳐 해외 방문을 했다. 첫 번째가 1981년 2월 초에 있었던 미국 방문, 두 번째로 1981년 6월의 아세안 순방, 세 번째는 1982년 8월의 아프리카 순방이 있다. 그 후에 1983년 10월 서남아시아·대양주 순방을 계획했다가 첫 방문지인 미얀마에서 아웅산 테러 사건이 터져서 순방 계획을 중단하고 귀국을 했다. 그래서 1983년 해외순방은 대부분 불발이 된 거다.


우선 아세안 회원국 순방에 대해 말해보겠다. 전두환 대통령은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필리핀 5개국을 순방하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아세안 회원국에 대한 첫 순방이다. 아시다시피 아세안은 동남아 지역 여러 국가들이 회원국으로 있고, 우리 입장에서 일본·중국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인방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원 보유국이다. 인도네시아에는 석유자원·가스자원·삼림자원이 있고,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로 산림자원이 있다. 필리핀도 산림자원이 있고, 우리나라 건국 초기부터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다. 한국 전쟁에 파병도 해줬다. 이 나라들은 아시아에서 소위 말하는 참전 16개국에 속하는 태국과 더불어 대단히 가까운 나라들이다. 이러한 경제협력 외에 안보적인 측면에서 상호 연관성도 있어서 당시 아세안 회원국과의 유대를 강화해야겠다는 외교 목표가 있었고, 그래서 대통령의 순방을 계획했던 거다.


특히 이 순방에서 경제협력·자원외교보다는 안보관계의 상호 연관성을 중심으로 해서 공동성명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1981년 1월12일 우리가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상호 교환 방문을 제의했다. 최고책임자란 양국의 수뇌다. 그다음에 6월5일 아세안 순방 바로 직전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다. 1월12일의 제2의 후속 조치로서 남북정상회담과 남북 간 UN 동시 가입 등을 우리가 제의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방문하는 아세안 국가들에게 주지시키고,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우리의 노력을 홍보하려고 했다. 그래서 동북아시아의 안전과 평화는 동남아시아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는 소위 공동 인식을 유도하려고 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인도네시아·태국·싱가포르·필리핀은 이 공동성명에 찬성했는데 말레이시아는 달랐다. 동북아시아의 안전과 평화는 동남아시아의 안전과 평화와 긴밀히 연관이 돼 있다고 하는 연관성을 부각시키는 데 대해서 굉장히 저항을 했다. 공동성명 문제로 다음 날 새벽까지 어렵게 진행됐지만, 최종적으로는 해당 내용이 포함이 됐다.


그만큼 당시 말레이시아는 아세안 중에서도 특히 비동맹적인 색채가 강했다. 당시 인도네시아와의 공동성명이 하나의 모범답안 같은 것이었다. 거기서는 지역정세를 검토하고, 양 정상은 양국이 위치한 각 지역의 평화와 안정은 상호 긴밀히 관계가 있으며, 나아가 아시아 및 전 세계의 평화 안전 유지에 필요 불가결하다고 하는 점을 상호 인식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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