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전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에 휘청거리고 있다. 이 역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만들면서 서서히 세상의 질서를 허물고 있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거리’를 유지할지, 먹고살기 위해 ‘거리’를 무너뜨릴지를 선택해야 한다. 거리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는 분명하다. 누군가의 목숨이다. 내가 될 수도 있고 내 지인, 이웃이 될 수도 있다.

최근 우리나라는 매일 50여 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다. 2차 대유행이 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들이 깊어지고 있다.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전혀 다른 세상이다. 전 세계 확진자는 8백만 영을 넘어섰다. 사망자만 45만 명이다. 미국은 확진자가 220만 명을 넘었고, 지금까지 12만 명이 죽었다. 2차 대유행을 말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대유행은 현재 진행형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도 전염병은 있었다. 스페인 독감은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5억 명이 감염되어 3천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세계 1차 대전이 있었던 1918년~19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스페인 독감은 한반도에도 상륙했는데, 공교롭게도 3.1 만세운동이 벌어졌을 무렵이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조선 인구 1,670만 명의 44% 742만 명이 감염되어 14만 명이 사망했다. 

이런 역사적 기록을 보면 당시 백성들은 전염병의 침습 속에서 분연히 태극기를 들어 일제에 맞섰던 것으로 보인다. 역병에 대한 공포보다 일제에 대한 분노가 더 컸기 때문일 것이고, 시대의 한계로 역병에 맞서기 위한 ‘거리 두기’의 필요성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역병 조심한다고 거리두기 하면서 만세운동을 했다면 독립만세운동의 삼엄함은 찾을 길 없었을 것이다.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인간 세상의 합리적인 사고를 방해한다. 원인과 상관없이 인간의 공포심 자체가 사회를 극단으로 몰아간다. 전염병이 원인이면 사람을 병균 취급하고, 이념이 공포의 원인이 되면 빨갱이로 몰아 죽이길 서슴지 않는다. 과학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전염병이 역신(疫神)의 지위를 얻었던 것은 이런 극단의 공포를 길들여 보려는 노력 덕분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역신이 백 년 만에 귀환한 것이다. 역신이 만드는 혼세 중에 철없는 북한마저 과거의 옷을 입고 돌아왔다. 역신은 스페인 독감에서 코로나19로 옷이라도 갈아입었는데, 북한은 전에 입던 ‘벼랑끝 전술’을 다시 걸치고 돌아왔다. 북한이 입고 나온 ‘벼랑끝 전술’도 공포를 조장하고 상대를 위협한다는 측면에서는 역신이라 불러 부족하지 않아 보이긴 하다.

‘벼랑끝 전술’이 북한만 사용하는 특이한 외교전술은 아니다. 국제외교 무대에서 ‘벼랑끝 전술’은 흔히 있어 왔다. ‘벼랑끝 전술’은 상대방을 위협하거나 의도적으로 위기를 조장해서 양보를 유도하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해 보려는 외교 전술일 뿐이다. ‘벼랑끝 전술’은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지 전쟁을 목표로 한 절차는 아니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역신과 북한의 차이는 공포로 얻고자 하는 것의 다름에 있다. 역신은 우리의 생명을 앗아가고자 하지만, 북한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자 할 뿐이다. 북한이 다시 벼랑 끝에 선 이유, 김여정이 외삼촌 보듯 하던 문 대통령에게 험한 말을 퍼붓는 이유, 급기야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실존의 위협 속에서 살려 달라 울부짖고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