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뉴시스]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소련 “한·소 정상회담 별도로 갖자”

노태우 “시작이 반이다”

- 6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초의 한·소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그때까지 경과를 말씀해 달라

▲ 3월22일의 김영삼 최고위원과 고르바초프의 회담 이후의 진전사항을 이야기하겠다. 브루텐츠 부부장이 서명해 건넨 고르바초프의 구두 메시지를 박철언 장관이 서울에 와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전달하며 보고를 했다. 사실 고르바초프에게 보낸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에 대한 첫 반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다. 최소한 기록상으로는 그렇게 된다. 그때 브루텐츠에게 박철언 장관이 한·소 수교를 위한 채널에 관해 협의를 했다. 앞으로 우리가 이야기를 시작할 적에 어떤 채널을 이용하게 되는지를 물었더니, 몇 가지를 이야기했다. 모스크바에 있는 대한민국 영사사무처 채널, 그다음에 비밀채널이라 할 수 있는 두나이예프라는 사람을 통한 채널이다. 두나이예프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동향 사람이자, 비서실장의 심복 같은 사람인데, 소련의 문학평론지인 『리떼라뚜르나야가제따』의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은데 이 사람이 동시에 『리아노보스티』도 겸해서 하고 있는 걸로 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 기록에 나오는데, 또 하나 창구가 더 있었다. 
4월 말에서 5월 초쯤의 일로 기억한다. 우리는 두나이예프가 도쿄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모스크바에 나타나서 우리 영사처에 연락을 해왔다. 그래서 서현섭 참사관과 저녁을 같이 하기로 했다. 그전까지는 모스크바에는 전부 국영식당만 있는데, 페레스트로이카를 하면서 개인 영업을 하게끔 허가를 해서 많은 조인트벤치 식당이 생겼다. 모스크바 시내의 한 2층에 있는 조인트벤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두나이예프가 천장을 보면서 도청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큰 뉴스가 있다. 밖에 알려지면 아주 세상이 깜짝 놀랄 거다”라고 운을 뗀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회담을 갖는다는 말을 했다. 
누구하고 어떻게 만난다는 이야기는 없이, 구체적인 날짜는 아나톨리 도브리닌 대통령고문이 서울로 가서 직접 노태우 대통령한테 전달할 것이라는 말을 들려줬다고 했다. “굉장히 손에 들어오기 어려운 목표의 하나였던 한·소 정상회담이 아니라면 세상이 깜짝 놀랄 일이 뭐가 있겠느냐” 하고 추측을 하면서 서울에 전보를 쳤다. 제가 장관에게 공전이 아닌 서비스로 전보를 쳤다. 이 구술을 준비하면서 그 전보를 찾아보라고 했더니 그런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쨌든 그 전보 때문에 후일 서울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제가 그 후에 알아보니까 박철언 장관이 도쿄에서 두나이예프를 만났다고 했다. 

- 노태우 대통령의 정상회담 의사를 전달했다는 건가? 
 
▲ 네, 그 의사를 모스크바에 빨리 전달해 달라고 박철언 장관이 여비까지 주면서 보냈다고 했다. 그 후 모스크바로 돌아온 두나이예프가 우리 공관원을 만나 ‘큰 뉴스’를 서울에 전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서울에 전보를 쳐서 알렸다. 그런데 사실 그때 서울에서는 영사처에 나와 있던 안기부 직원을 통해서 전보가 들어오리라고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전보를 장관에게 바로 보냈으니 장관이 김종휘 외교안보수석한테 일러주게 됐다. 그래서 바로 대통령에게 보고가 됐다. 마지막 단계에선 안기부가 바이패스됐다.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은 꽤 어렵게 이루어졌다.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에 가기 전에, 아나톨리 도브리닌 소련 대통령고문이 전직 정부수반협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이 모임은 원래 헬무트 슈미트,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와 같은 전직 수반들의 포럼이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신현확 전 부총리가 참여하고 있었다가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는 이홍구 전 총리가 참여하고, 일본은 후쿠다 수상이 했다. 

그 회의가 5월에 서울에서 열리게 됐는데, 그 회의에 소련 멤버로 도브리닌이 참여하게 되면서 그 메시지를 가지고 왔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별도의 정상회담이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하고 구체적인 날짜를 정하는 등의 절차를 위해 이정빈 외무차관보가 워싱턴으로 가서 도브리닌과 접촉을 했다. 그때 이것저것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그 정상회담을 주선하기 위한 과정에서 몇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맨 처음에 우리가 미국 대통령이 고르바초프를 만난 때 우리 대통령을 초청해서 같이 3자가 커피나 차를 마시는 식으로 한·소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랬더니 소련 쪽에서 한·소 정상회담을 별도로 갖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샌프란시스코를 제의했다. 그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뒤에서 조정해 준 게 조시 슐츠 국무장관이다. 슐츠 장관이 고르바초프와의 친분 관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줬다. 슐츠 장관이 기여가 컸다는 것을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인 노재봉 박사나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을 알고 있었다.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 미국이 한·소 수교에 대해 측면 지원을 했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 당시 미국은 한·소 수교를 어떻게 보고 있었나? 미국의 대소정책이나 냉전정책에 도움이 되리라고 해석을 한 것인가? 

▲ 그렇게 봤다. “미국은 한국이 약간 소련 쪽으로 끌려가는 데 대해서 견제하지 않았느냐” 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렇지 않았다. 슐츠의 역할을 보시더라도 알 수 있고, 우리가 3자 간에 차를 마시는 형식을 제의했을 때도 미국이 그렇게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6월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초의 한·소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거리서 노태우 대통령은 한·소 국교정상화와 양국 간의 경제·사회 등 관계 개선에 대한 강한 의욕을 표명했다. 정상회담 결과 발표문의 제4항에는 “관계정상화 노력은 이미 시작됐다. 머지않은 장래에 완전한 수교관계를 이루도록 노력해 가기로 양국 정상은 합의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제6항은 “양 정상의 관심사항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정부와 경제계 인사로 대표단을 구성해서 교역과 경제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방안을 협의할 것이다”였다. 이런 중요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합의가 됐다. 그런 가운데 노태우 대통령이 “한국말에 시작이 반이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지금 평양에 가는 길은 막혀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통해서 평양으로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그것은 최선의 길은 아닐지언정 지금 택할 수 있는 차선의 길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당시의 심경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45년간의 냉전체제를 뛰어넘어 한반도의 새로운 변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고 있다고 본다고 했다. 

그리고 두 정상은 상호 방문을 초청했고, 그러한 고르바초프의 초청을 받아서 노 대통령은 12월14일 모스크바에 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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