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미국 안보에 필수적인 나라이니 미군이 철수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었지요. 베트남이 공산화되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인권도 중요하지만 생존이 더 중요하다, 만약 미군이 철수를 감행하면 우리도 핵 무장하겠다... 주로 이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박정희가 40분 동안 일방적으로 하도 따지니까 카터가 글라이스턴 주한 미국 대사에게 메모를 주었답니다. 한국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주한미군을 기어이 철수시키고 말겠다는 것이었답니다. 카터는 또 남한이 북한보다 인구도 많고 경제력도 앞서는데 왜 군사력이 모자라느냐고 엉뚱한 반격을 했다고 합니다.”

“패권주의 제국의 횡포군요. 미군 철수를 받아들일 리 없으니 그걸 빌미로 자신들이 원하는 걸 얻으려는 전략 아니겠어요?”
고유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정세찬에게 동조를 구했다.
“그렇지.”

정세찬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카터가 청와대에서 박정희의 안보 강의를 듣고 숙소로 돌아갈 때 차에 함께 탄 베시 주한 미군 사령관과 글라이스턴 대사가 한국 정부의 긴박한 사정을 설명하자 카터는 ‘예수님 믿으시오’ 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고 합니다.”
일동은 큭큭 웃었다.

“당시는 박정희가 유신정치 선포를 하고 긴급조치를 발동하는 등 개발 독재가 절정을 이룬 시기였지요. 미국의회와 종교단체도 박정희 정부를 비난하는 성명을 매일 내다시피 했으니까요. 그러니 카터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겁니다. 결국 석 달 뒤 10월 박정희는 암살되었지요.”
“그 전해인 1978년에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되었는데 아시다시피 그때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가 독점적으로 참여했지요. 그다음 월성 원전 때부터 캐나다가 참여했어요.”

원전에 관해서는 수원이 설명했다.
“당시 한국 정부가 원전 공급을 다양화하기 위해 프랑스와 은밀히 손을 잡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정세찬의 말에 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지금 가동 중인 10개 원전 중 7개가 미국 회사와 합작한 것이고, 나머지는 캐나다 2개사, 프랑스 1개사예요. 북한도 핵기술이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핵연료를 가져오는 건가요?”
수원의 질문에 정세찬이 즉시 대답했다.

“북한에는 양질의 우라늄광이 많이 있어요. 일제 강점기에 확인된 것인데, 약 4백만 톤 정도의 매장량이 있답니다. 김일성은 1950년대부터 풍부한 우라늄을 이용할 것을 검토했다고 합니다. 그때 소련과 원자력 이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거든요.”
“한국 전쟁 때 이미요?”

“전쟁 직후입니다. 그 뒤 1965년에 연구용 원자로를 영변에 설치했고, 소련이 농축도 10퍼센트의 핵연료를 공급했지요. 북한은 1년도 채 안 돼 농축도 80에 이르는 핵 농축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그때 남한에서도 알고 있었나요?”
유미가 질문했다.

“물론이지. 박정희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우라늄 95 이상의 농축 기술과 핵연료를 제공해 줄 것을 미국에 요구한 거였어.”
“그래서 박정희는 자력으로 핵을 개발하거나 제3국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거군요.”
수원이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게 하려고 무진 노력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성공하지는 못했지요. 반면 북한은 겉으로는 안 한다, 안 한다 하면서 개발을 계속했습니다. 만약 남북이 통일되어 힘을 합친다면 강대국들 걱정이 클걸요.”
정세찬은 국제정치학자답게 전문적으로 설명했다.

“북한이 처음 농축 기술을 사용한 것은 프랑스의 초기 기술인 GI형이라는 원자로에서부터지요. 1980년에 북한은 5MWe라는 원자로의 가동에 성공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때 한국 정부는 정인숙 스캔들을 막느라고 정신이 없었지요.”
“정인숙 스캔들이 뭐예요?”
유미가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한강변 대로에서 미모의 여인이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되었는데 그 여자 이름이 정인숙이야. 본래 요정 아가씨로 세 살짜리 아들을 키우고 있었지. 그 아들이 대통령의 아들이라느니 국회 의장의 아들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정신없이 떠돌았어.  온 나라가 날만 새면 그 얘기로 수군거렸지. 요즘 같으면 인터넷상에서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퍼졌을 거야.”
“독재가 강할수록 루머가 판을 치는 법이지요.”

성민이 한마디 했다.
그때 정세찬의 핸드폰이 울렸다. 정세찬은 번호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니입니다. 실례할게요.”
밖으로 나간 정세찬은 1분도 채 안 돼 돌아왔다. 얼굴빛이 굳어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유미가 물었다.

“지금 서울로 가봐야겠어요.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 암 투병 중이셨거든요.”
“어머, 어서 가보세요.”
수원이 먼저 일어섰다.
“우선 룸으로 올라가서 짐을 챙기시지요. 그동안 제가 체크아웃 해 놓겠습니다.”

성민이 위로하듯 정세찬의 손을 잡았다.
결국 정세찬과 유미는 서울로 올라가고 수원과 성민은 태종대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수원은 낭떠러지 밑에서 바위를 핥으며 철썩거리는 파도를 내려다보았다.
“정 박사님은 부모님이나 친척이 모두 미국에 계시다고 했는데...”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수원이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
“처음 만났을 때 유미가 말해 줬어요.”
“거 참, 남자 친구 가족 상황도 제대로 모르면서 사귀나?”
“흘려들은 탓이겠지요.”

성민이 슬그머니 팔짱을 끼자 수원은 조용히 팔을 뺐다.
“여기 처음이지요?”
“응. 처음이야. 부산에 와도 시내에서 볼일만 보고 올라가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언제 끝나는 거예요?”
“이번 여름이면 끝날 것 같아. 본사에서 내일이라도 들어오라면 가야지 뭐.”
본사라면 성민이 원래 소속돼 있는 컨버스천 엔지니어링을 말하는 것이었다.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 연재 순서상 1371호<26>에 이어진 부분입니다. 지난호에 연재된 내용은 <28>에 해당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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