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은 이튿날 출근하자마자 영준에게 어제 일어났던 일을 얘기했다.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전혀요.”

“침입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까?”
“열쇠 기술자 말이 침입은 못했을 거라 하는데... 제가 살펴봐도 침입 흔적이 없었고요.”
“그래도 혹시 모릅니다. 도청 장치를 했을지도 몰라요. 퇴근할 때 저랑 같이 가보지요. 도청 탐지기를 가져가 봅시다.”
“도청 장치를 했다면, 이유가 뭘까요?”

“우리 회사 일이나 한 차장님이 연구하고 있는 일에 관계가 있겠지요.”
그날 저녁 영준은 수원의 오피스텔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도청 장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휴, 다행이네요.”

수원은 영준에게 커피를 대접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커피만 마셨다.
“그분들은 서울로 가셨습니까?”
분위기가 어색해질 무렵 영준이 입을 떼었다.
“네, 어제.”

“원자력 발전소 견학은 만족하시던가요?”
“네. 신세계에 다녀온 듯하답니다.”
“배 박사는 미국 회사에서 파견 나온 분이라고 했지요? 그럼 미국엔 언제 돌아가는 겁니까?”

“글쎄요, 아직 일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배성민 씨는 어쩐지 외국사람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요? 잘 보셨어요. 생각하는 게 한국사람 같질 않아요.”
영준의 말에 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세찬 박사는 언제부터 아는 사이십니까?”
“얼마 안 되었어요. 친구 유미가 소개해 줘서 알게 됐죠.”
“학자 스타일이면서도 야망이 숨어 있는 것 같아 보이더군요.”
“어머, 그래요? 전 잘 모르겠던데.”

그제야 수원은 영준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은근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며칠 뒤 확대 간부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수원이 영준을 불러 세웠다.
“주 차장님, 잠깐만요. 우리 커피 한 잔 하고 가요.”

수원은 회의실 입구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빼 왔다. 두 사람은 벽에 기대어 서서 대화를 나누었다.
“안토니오 수사는 진전이 없나요?”
수원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물었다.

“그 일 때문에 어제도 종일 수사관들하고 같이 있었습니다.”
“뭐 새로운 정보라도?”
영준은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텔에서 알아낸 세 명 중 미국인 클라크와 조명진은 이미 출국했답니다. 이경만이라는 사람만 경찰서로 임의 동행해서 조사를 받았답니다.”
“뭐하는 사람들이래요?”

“장 안토니오가 바다낚시 회원을 인터넷으로 모집했는데 그것으로 알게 된 사이라고 합니다.”
“바다낚시 모임이오?”
“스카이다이빙 유경험자를 회원 자격 요건으로 내걸었다고 합니다. 이경만은 그날....”

“그 날이라니요?”
“장 안토니오가 죽은 날 말입니다. 그날 장 안토니오와 둘이서 안토니오 2호를 타고 발전소가 있는 기장 앞바다로 갔었답니다. 안토니오는 발전소 앞 1킬로쯤 전방에서 배를 세우고 있다가 어디선가 전화를 받고 혼자 물속으로 들어갔답니다.”

“무슨 일을 하러 갔는지도 이야기했나요?”
“그게 좀 명확하지 않습니다. 장 안토니오는 반핵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가끔 아나톨리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나톨리라고요?”

수원이 놀라 되물었다.
“예. 그 날 배 위에서도 아나톨리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나톨리가 실존 인물이라는 말이에요?”
“이경만도 아나톨리의 정체는 알지 못한답니다.”
“이경만의 직업은 뭐래요?”

수원은 영준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청파동 전자상가에서 조그만 전파상을 하고 있답니다. 컴퓨터나 통신기기에 대한 특허를 여러 개 가지고 있대요. 기술은 좋은데 돈벌이는 별로 안 되는가 봅니다.”

“그럼 장 안토니오로부터 금전적 도움을 받았겠군요.”
“수사팀이 확인한 걸로는 장 안토니오가 적지 않은 돈을 이경만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반핵 활동을 하는 장 안토니오가 아나톨리의 지시를 받고 원전 폭파 계획을 세웠던 거군요.”
“수사팀도 일단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여전히 미심쩍은 것이 많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안토니오 클럽은 낚시 가게를 위장한 반핵 테러 단체일 수도 있겠네요.”
“저도 그렇게 짐작됩니다. 외국으로 나간 두 사람을 심문해 보면 확실해지겠지요.”

“폭력성 무기 개발을 반대한다면서 폭력을 쓰다니. 모순된 일이로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요즘 사태가 심상치 않으니 한 차장님도 핸드폰에 SOS 기능을 활용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SOS 기능이요?”

“위급한 상황에서 해당 버튼을 누르면 미리 입력해 둔 전화번호로 도움 요청 메시지가 전송되는 기능입니다.”

수원은 며칠 전에 일어났던 오피스텔 침입 미수 사건이 생각났다.
“좋아요. 주 차장님이 도와주세요.”
수원은 휴대폰을 영준에게 건넸다. 영준은 평소처럼 별다른 표정 없이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제 번호를 입력해 두었습니다. 비상시 휴대폰 폴더가 닫힌 상태로 소리조절 버튼을 네 번 연속해서 누르십시오.”
영준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수원의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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