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살인마로 이름을 떨치던 태홍일이 탈주한 것은 지난 토요일 밤이었다. 갑작스러운 비상소집령에 시경으로 황급히 들어선 추 경감은 그 내용을 알고 입맛이 썼다. 도시에서 산야로 1주일 헤맨 끝에 간신히 잡았던 살인마가 탈주했다니. 강 형사도 역시 오뉴월 오이 꼭지를 씹은 표정이었다.

“교도 행정을 어떻게 보고 있기에 이런 일이 생긴답니까? 내 참, 이런 일은 꼭 생겨도 휴일에 생긴다니까.”
“왜, 데이트 약속이라도 있었나?”

추 경감이 담배를 한 대 꺼내 물며 여유 있게 느글거렸다. “데이트는 무슨 데이틉니까? 이번 휴일에 밀린 잠이나 푹 자보려고 하다가 공친 거지요.”
강 형사는 옆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무슨 소식이라도 있는 건가?”

추 경감이 물었다. “별 소식은 없습니다. 탈주 직후에 바로 알아차려서 반경 50km 안에 비상선을 치고 검문검색을 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태홍일이 어떤 놈인데 거기에 걸리겠습니까? 아마 잡힐 때까지 또 서너 명이 희생될지도 모르지요.”

강 형사는 거의 체념 조의 말투로 말을 이었다. “탈주는 호송 열차에서 이뤄졌는데 어떻게 포승과 수갑을 풀었는지는 영 모르겠다는 말이고요, 탈주 장소는 청주 못 미친 국도변입니다.”

“근처에 놈이 갈 만한 곳은 없나?” “원래 서울 놈인데 갈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충청도에는 안면도 없고 녀석의 범행도 모두 서울과 경기도 인근에서 벌어졌던 건데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물론 녀석이 사형으로 형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발악적으로 탈옥할 수도 있지만, 이미 준비를 하고 있다가 탈출을 한 것으로 보아서는 근방에 협력자가 있거나 원한을 품은 상대가 있을 수 있다고.”
추 경감이 진지하게 말하자 강 형사도 머리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녀석은 원래 단독범행을 했기 때문에 협력자가 없는 것은 분명하다고요, 원한을 품은 대상자가 있는지는 확인을 다시 한 번 해봐야 하겠는데요.”
“그럼 우물거리지 말고 빨리 조회해 봐” 추 경감이 강 형사의 등을 떠다밀었다. “어어, 갑니다. 간다고요!”

투덜거리며 자료실로 갔던 강 형사가 파일을 들고 나타나는 데는 10분이 채 안 걸렸다.
“있습니다. 오용주라는 사내에게 볼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딘지 알지?” “예, 그 국도에서 20km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럼 됐어. 나머지 보고는 차 안에서 듣자고.” 추 경감이 벌떡 일어났다.

“어, 어디 가시게요?” “어디 어디야? 오 뭐라는 사람 집이지.” “하, 하지만.”
“하지마는 무슨 하지만이야. 빨리 따라와.” 추 경감은 강 형사의 어깨를 찰싹 치며 휑하니 문을 나섰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강 형사도 어깨를 으쓱하고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오용주라는 사내는 누구야?”
강 형사는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받으며 자료를 머릿속에서 정리해보았다. “그 태홍일이 마지막으로 한 범행을 기억하십니까?” “잊어버릴 수가 없지. 코가 비뚤어진 자신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어린 시절 자신을 놀렸던 친구들을 하나씩 죽였었지.”

“그때 모두 3명이 죽었고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져 언론한테 심하게 두들겨 맞지 않았습니까?”
“음, 그랬지.”
“결국은 견지선이라는 초등학교 동창을 미끼로 해서 녀석을 체포했지요.”
강 형사는 아무리 밟아도 100 이상의 속도가 안 나오는 자신의 고물차를 원망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 살해 후보에 오른 인물 중에는 오용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반장이었는데 지금은 건축기사로 있지요.” “견지선이는 여자였잖아? 왜 남자인 오용주를 미끼로 쓰지 않았지?”

“그때 제가 만나보았지요. 겁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그런 일에는 나설 수가 없다고 했어요.”
“음, 맞아. 그래서 자네가 그렇게 욕을 했던 기억이 나는군. 그런데 그 친구가 지금 그곳에 있다?”
“예, 그 근방에 새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는군요. 그래서 그곳에 있답니다.”
“음, 그렇군. 그럼 정말 위험한데? 가족들과 함께 있나?”

“아닙니다. 독신이고 가족들은 모두 이민을 가지요. 그 사건 이야기를 해 주자 자신도 이민을 가야겠다고 하더군요.”
“음, 차라리 이민을 갔으면 여러 사람을 위해서 좋았을 것을…….”
추 경감이 혀를 찼다. 그는 이미 나쁜 예감이 적중했다는 확신이 있었다. 건설 현장에 도착하자 그것은 사실임이 밝혀졌다. 인부들이 모두 나와 웅성대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구급차도 한 대 도착했다.

강 형사가 경찰 신분증을 치켜들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늙수그레한 인부 하나가 대답했다. “강도가 든 모양입니다. 현장 감독 현장식당에서 비명이 났어요. 가 보니까 살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완전히 지옥이더군요.”

추 경감은 그사이에 구급차로 뛰어갔다. 두 사내를 태우고 있었다. 한 사내는 이미 죽은 듯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또 한 사내는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추 경감은 얼굴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내밀다가는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얼굴에 염산을 부은 모양인지 얼굴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죽은 사내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망가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수의가 그의 신원을 말해 주고 있었다. 살아서 구급차에 실린 사내는 색이 바래 무르팍이 허옇게 된 청바지에 피가 튀어 끔찍하게 보이는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범행에 사용된 염산은 숙소 밖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사건의 줄거리도 잡혔다.
“태홍일이 범행을 위해 현장식당을 들어가면서 염산을 집어 들었던 거고, 침입을 눈치챈 오용주와 일대 격투가 벌어져 그만 염산이 두 사람의 얼굴과 손에 튄 거지요.”

강 형사가 속 시원하다는 투로 말했다. “지문 확인도 안 되게 손가락마저 뭉개졌다는 건 뭔가 찝찝하거든….”
추 경감이 담배로 테이블을 툭툭 두들겼다. “검시 결과를 보시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강 형사가 서류를 펴보았다. “사인은 목 졸림에 의한 질식사라….” 추 경감은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강 형사, 만약에 말이야, 이런 시나리오도 가능하지 않을까?”

“어떤 시나리오 말씀입니까?” “태홍일이 곤히 자는 오용주를 가볍게 목을 눌러 죽인다. 옷을 자기 것과 서로 바꿔 입고 다음에 얼굴과 손에 염산을 부어 형체를 지운 뒤 자신의 손과 얼굴에도 염산을 뿌린다는 시나리오일세.”

“에이, 반장님도? 인간의 육체로 그런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물론 없겠지. 하지만 만약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태홍일뿐이라고 나는 믿네.”

강 형사는 여전히 회의적인 눈치였다. “반장님, 설령 그렇다고 한다면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 태홍일이라면 기억 상실증 환자 흉내라도 낼 수 있는 놈입니다” “그래, 그게 문제야. 현재는 증명할 길이 없어. 그리고 더욱 문제는 녀석이 정신이 들면 바로 탈옥을 하지 않을까. 그게 더 걱정이네. 그 정도의 속임수를 밝혀낼 방법은 자네 생각보다 훨씬 많아. 아마도 녀석이 노리는 것은 잠깐의 시간을 벌자는 것일 게야. 치료도 받고 우리의 주위를 돌린 다음 다시 병원에서 사라지는 거지. 만약 없어진 시점에서도 우리가 눈치를 못 채면 어디선가 성형수술까지 받을는지도 모르지.”

추 경감이 초조하게 담배를 테이블에 두들겼다. “녀석과 오용주의 신장은 어느 정도 차이가 나지?”
“아마도 5cm 정도 오용주의 키가 컸던 것으로 아는데요.”
“그래? 녀석이 청바지를 입고 있었지?” “예, 그렇습니다만….” “그거면 됐어. 병원으로 가자고.”
 

퀴즈. 추 경감은 어떻게 두 사람을 구분해 낼 수 있을까요?

 

[답변 - 5단] 죽은 오용주는 태홍일보다 5cm 키가 더 컸다. 그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으므로 청바지의 주름은 태홍일과 일치할 수가 없다. 무릎 주의의 선을 확인해 보면 병상의 환자가 오용주인지 태홍일인지 판명된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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