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휴의 재계 원로 탐험 <20>

윤능선 미래사회연구원 이사장

김일성의 남침으로 대한민국 운명이 풍전등화 격이던 1952년 피난 수도 부산의 명물은 신문팔이, 구두닦이와 부두의 얌생이였다. 이때부터 대한상공회의소 공채 시험에 합격한 윤능선의 경제단체 인생 40년이 시작됐다. 피난민과 실업자 천지이던 , 철의 삼각지대에서는 아직도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피난 수도에는 갑자기 불어난 200만 인구가 ‘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을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전쟁고아와 미망인이 많았다. 외래품이 넘치고 참전 유엔군 병사들도 떼로 몰려 다녔다. 국제시장, 자갈치 시장이 활기에 넘치고 빈대떡 집에서 딱지도 없는 소주 한잔으로 절망의 하루를 넘기는 것이 전쟁기의 풍속도였다.

올챙이 신입사원 윤능선의 경제단체 인생 초기 기록은 피난수도의 댄스 열풍으로부터 시작된다. 전쟁미망인과 여대생이 유엔군 장병과 어울려 언제나 댄스홀이 북적였다.


남포동 천막에서 공채시험

때는 1·4후퇴로 세상이 뒤숭숭할 때 국제구락부 사건으로 정국마저 소란했다. 이 무렵 유엔대표로 우리나라 총선 감시단장을 지낸 인도의 메논 박사가 다시 내한했다. 그는 신생 대한민국에게 매우 우호적인 인물로 국빈이나 다름없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그를 환영하기 위해 송도구락부에서 댄스파티를 열었다. 올챙이 신입사원이던 윤능선은 당시 메논 박사와 시인 모윤숙의 댄스 모습을 보면 깔깔 웃었다.

두 사람이 다 같이 뚱뚱한 배를 맞대고 춤추는 장면은 누가 상상해도 웃음이 나올 만 했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시인 모윤숙 여사는 진작부터 메논 박사와 염문을 풍긴 사이였다. 두 사람의 친분이 댄스파티로 더욱 두터워졌음은 물론이다. 당시 댄스 바람은 전쟁의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으며 참전용사들을 위로해 주었다. 이때 전축 수요가 일어나 뒷날 별표전축 천일사가 창업되고 전자산업의 기틀이 마련되기도 했다.

1952년 4월, 대한상의 첫 공채시험은 부산 남포동의 선린상고 천막교실에서 실시돼 6명이 합격했다. 윤능선은 당시 영어시험이 타임지에 실린 유엔정전회담 미국 측 대표인 조이 제독 관련 기사의 번역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대한상의 사무실은 광복동 미진상회 2층이었다. 1층엔 충무공기념사업회, 3층엔 한국무역협회 사무실이 있었다. 인기가수 남인수가 1층 사무실에 자주 출입했다.

미진상회 사무실은 부산 갑부 이년재가 빌려줬다. 그는 우산으로 거부가 돼 부산상의 회장을 지낸 분이다.

부산에서 재건된 대한상의 초대 회장은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가 맡았지만 1년 남짓 만에 물러나고 2대 회장 이동선씨가 납북되고 3대 회장 전용순씨가 피난지에서 재건업무를 맡았다.

전용순 회장은 개성출신으로 선린상고를 나왔지만 독학으로 약제사 시험에 합격하고 의사시험에도 합격한 수재였다. 또 한문에 뛰어나고 영어도 능통했으며 인간관계가 넓고 활동범위도 매우 다양했다.

8·15 해방 후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이승만 박사가 환국하자 가회동 자택으로 이 박사를 모셨다. 일제 때는 제약회사를 설립, 모르핀을 제조해 중국전선에 대량 공급해 거부가 되었다.

이때 가회동 박흥식 사장집 뒤에 2000평 규모의 대저택을 장만했다.

윤능선은 전 회장이 키가 큰 거인으로 정계요인들과 잘 어울리는 거물이었다고 회상한다. 당시 경성전기 이중재 사장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으며 경방의 김용완 사장한테는 ‘꼬마’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60년대 한국 드라마의 원류

윤능선의 경제단체 인생에는 대한상의가 피난지에서 발행한 ‘주간경제’가 우리나라 경제개발에 획기적인 발자취를 남겼다고 강조한다. 당대 최고의 주간경제 필진들의 면면이 이를 말해준다.

배성룡, 최호진, 이창렬, 고승제, 원용석 씨 등 경제학 대가들을 비롯해 이동욱, 박운대, 이관구 씨 등 언론계와 변영노, 박종화 씨 등 대가들이 망라되었다.


진학문 부회장의 진기한 삶

윤능선은 부산 피난시절로부터 대한상의가 중심이 돼 기업인들의 경영마인드를 심어줘 뒷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한국 드라마’가 연출될 원류가 형성될 수 있었다고 풀이한다.

그는 1952년부터 92년 은퇴 시까지 경제단체 인생을 회고하며 한국 경제진단과 처방에 관한 외국 석학들의 충고와 권유를 메모해 왔다.

1960년대 내한한 서독의 에르하르트 경제상은 반도호텔에서의 강연에서 자유시장 경제를 예찬하며 서독의 경제기적 원동력이 시장경제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로스토 교수는 서울대 특강을 통해 경제발전 단계론으로 보면 한국경제가 도약단계에 이르렀다고 주장했고 미래학자 허만 칸 박사는 ‘21세기는 한국의 해’가 되리라고 예측했다.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하이에크 박사는 자유시장 정보야 말로 인류 최선의 정보하고 강조했다. 일본의 경제연구센터 오기타 소장은 “한국은 노동집약 산업 대신 고용흡수형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좋다”고 지적했다.

윤능선은 경제단체에 근무 할 때 이들 외국인들의 충고를 귀담아 들은 것이 밑거름이 돼 역동적인 한국경제의 근대화가 이룩됐노라고 주장한다.

윤능선의 경제단체 인생 40년은 대한상의 조사과장, 전경련 조사부장, 상무이사, 경총 사무국장, 전문, 부회장 등으로 주요단체를 모두 거쳤다. 전경련 시절 상근 부회장 진학문에 관한 회고가 가장 화제 거리다.

진씨는 높은 학문과 화려한 경력으로 넘치는 명사이다. 한때 독립지사로도 활약했지만 나중엔 친일의 꼬리가 붙어 다닌 특이한 삶을 살았다. 1894년 서울에서 태어난 진학문은 보성중학을 나와 와세다대학 영문과와 동격 외국어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오사카 아사히신문 기자로 사회에 진출했다.


홍사익 일본군 중장에 관한 회고

그 뒤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춘원 이광수와 함께 논설위원으로 참여했다가 정경부장을 지냈다. 다시 1924년에는 육당 최남선과 함께 시대일보를 창간, 편집국장을 역임한 언론계 경력이 화려했다.

문제는 1936년, 만주국 국무원 참사관으로 장관급 벼슬을 지낸 것이 탈이었다. 만주제국이 망하자 상해로 망명했다가 조국을 멀리 등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딸과 함께 지구의 반대편인 브라질로 이주해 서글프고 고달픈 삶을 겪었다.

그의 브라질 망명은 친일에 대한 자숙의 뜻이 있었지만 외동딸이 전염병으로 요절하자 후손을 위해 신천지를 개척하려던 꿈이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노후의 인생이 마지막을 위탁할 곳은 조국밖에 없었다. 1962년 그가 귀국했을 때는 70세의 고령이었다.
경제계는 노후에 귀국한 진학문의 능력과 경력을 활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전경련 상근 부회장으로 영입했다.

이때 그는 윤능선 부장을 불러 지나온 세월을 자주 회고하며 술잔을 나눴다. 날씨가 춥거나 궂은 날이면 청진동으로 발길을 옮겨 옛 추억이 남아 있는 단골집을 찾았다.

진씨는 술기운이 오르면 “여보 마누라, 뒤뜰에 뛰어놀던 병아리 한 쌍을 보았소”라는 유행가를 부르며 시름을 달래었다.

윤능선은 생전의 진씨에게서 들은 홍사익 일본군 중장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다.

조선인 가운데 최고 계급에 오른 홍씨는 일제하에서 음양으로 조선 독립지사를 많이 도왔다고 한다. 일본이 패전할 무렵, 홍 중장이 필리핀 포로 수용소장으로 발령 났을 때 진학문씨 등이 사임하고 귀국하라고 권유했지만 듣지 않았다.

“내가 일본군에 들어가서 제일 높이 올랐는데 비겁하게 행동하면 조선사람 수치가 아니냐”면서 임지로 떠난 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패전 후 그는 포로 학대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전후 필리핀인들 사이에 홍 중장의 인격이 알려지자 그의 유족들에게만 묘지를 개방하고 주변을 깨끗하게 단장해 놨다. 윤능선씨가 70년대 후반 동남아 연수단장으로 마닐라를 방문했을 때 그의 묘소를 찾았더니 일본군 장성들의 묘역은 유족들의 입국을 막아 돌보는 이가 없었지만 홍식의 묘역만 잘 다듬어져 있더라고 한다.


“나 먼저 갑니다” 동아일보에 생전 부고

진학문씨는 언론인으로 매우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동아일보와 시대일보를 거쳐 나와서는 세계여행 길에 올라 인도의 시성 타고르를 만나고 만주국 시대에는 나치스의 히틀러를 만난 위인이었다.

진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근무했던 동아일보 광고면에 실어달라면서 자신의 부음을 미리 작성해 뒀다.

“그동안 많은 총애를 받았었고 또 적지 아니한 폐를 끼쳤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먼저 갑니다. 여러분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학문이 높고 경륜이 다양했지만 오직 만주국의 벼슬을 맡은 것이 일생일대의 실수였으니 폐를 끼쳤다고 적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비록 진기한 삶을 살았을망정, 브라질로 갔다가 노후에 조국으로 돌아와 일생을 마감한 진씨의 생전 부고에서 숙연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는 소감이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던 시절

윤능선은 경제단체 40년을 물러난 후 미래사회연구원 회장으로 노익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경제인동우회와 한국노동팬틀럽 활동도 하며 노사문제에도 여전히 관심을 보여준다.

최근 고령화와 저출산이 주요 정책과제가 되고 있을 때 1973년, 국제노동기구가 경총에 가족계획사업을 맡아 달라 요청했던 일을 특별히 회고한다.

이때 대한가족계획협회 양재모 회장과 이사장 이종진 박사 등과 협력해 20여 차례 세미나를 가졌다. 나중에는 대한가족계획협회 이사와 홍보위원장도 맡게 됐다.

당시 윤 회장은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세미나를 주재한 입장에서 “자식이 많아 감투 쓸 자격이 없다”고 사양했더니 회장과 이사장이 “나도 딸부자”라면서 가족계획 실패 경험을 앞세워 ‘둘만 낳도록 설득하라’고 권유하더라고 했다.

윤 회장은 경제단체 인생 40년인 한국경제 유공자들의 발자취를 증언하는 실제상황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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